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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은 최고의 검색엔진에 등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날이 갈수록 수익구조는 악화되었던 구글의 수익모델을 찾기 위한 노력과 CEO 선임이 이루어진 2000년 전후의 이야기 입니다.  


AdWords 의 탄생, 그리고 CEO를 찾아라

세계 최고의 트래픽을 몰고다니는 서비스가 되었지만, 구글에게는 이제 이런 트래픽을 비즈니스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글의 공동 창업자들은 구글 검색에 과도한 비즈니스적인 요소를 연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런 생각은 가장 커다란 투자자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의 마이클 모리츠와 존 도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며 꼭 두 창업자를 끌어줄 수 있는 CEO 를 외부에서 영입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였습니다.

구글은 2000년 10월, 첫 번째 광고 프로그램인 애드워즈(AdWords)를 테스트 합니다.  350개의 광고업체만 받아서 그들이 선택한 키워드가 검색어로 들어오면 검색결과 옆에 작은 광고가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광고주들은 해당 키워드를 몇 번이나 사용자들이 이용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분석도구도 엉성했고 생각처럼 쉽게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애드워즈는 광고주들이 광고가 화면에 몇번 노출되는지를 기준으로 비용책정을 했는데, 이런 모델은 기존 배너광고에서 이용되는 CPM(Cost-Per-Mille, 1000번 노출당 단가) 방식의 변형이었고 GoTo.com 이 이미 CPC(Cost-Per-Click, 클릭당 단가) 방식의 검색광고를 시작한 상태였고, 그 반응도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CPM 방식을 채용한 애드워즈는 그렇게 큰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다양한 형태의 광고방식이 제안되었지만, 거의 대부분 구글의 창업자들에 의해 광고가 검색과 확실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집어넣을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철학에 가로막혔습니다.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대로는 구글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하에, 투자를 했던 당시의 약속인 '새로운 CEO를 영입하라'는 말을 지키라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두 공동창업자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기에 마지못해 여러 명의 CEO 후보자들과 미팅을 가지지만, 대부분 장난스러운 인터뷰를 하다가 '기술을 모른다'는 핑게로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놓은 CEO 후보들이 15명이 넘어가자,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 두 사람이 CEO 를 선임하지 않으려고 그냥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한 해가 이런 식으로 CEO 선임을 위한 작업으로 저물어 갔지만, 결국 CEO 는 뽑을 수 없었고, 전문경영인도 없었으며, 회사의 관리체계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야심차게(?) 내놓은 애드워즈는 그다지 커다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고, 비용을 수반하는 쓸데없는 트래픽만 자꾸 늘어나면서 과연 구글이라는 회사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론마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나마 해를 넘겨 2001년 1월에 애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등에서 운영 부사장으로 일했던 웨인 로징(Wayne Rosing)을 뽑으면서 엔지니어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관리가 가능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에릭 슈미트와의 인터뷰, CEO 를 찾아내다.

구글이라는 회사의 CEO 를 찾는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KPCB 의 존 도어에게는 구글의 CEO 로 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존 도어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입니다.  에릭 슈미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CTO 로 일하다가, 더욱 큰 꿈을 안고 노벨(Novell)의 CEO 로 적을 옮기게 되는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는 달리 노벨에서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가 합류했을 때 노벨의 4분기 매출은 목표액에 1,460만 달러나 적었고, 경영진들은 이를 분식회계로 메꾸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에릭 슈미티는 그대로 발표하기로 하고 노벨의 주가는 곤두박질치면서 회사가 바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큰 꿈을 안고 들어간 회사가 입사하자마자 위기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존 도어의 추천과 함께 웨인 로징에 대한 평판을 알기 위해 세르게이 브린이 에릭 슈미트에게 전화를 해서 장시간 통화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구글에 잠시 들르기로 합니다.  2000년 12월, 에릭 슈미트는 약속대로 구글을 방문합니다.  2000년 당시 구글이 사용하던 건물은 마운틴 뷰의 빌딩21 이었는데, 이 건물은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재직하던 시절에 썬의 건물로서 일하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회사는 달랐지만 장소라는 측면에서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CEO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는 아니었지만, 에릭 슈미트는 존 도어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였고, 또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역시 에릭 슈미트가 과연 구글 CEO 가 될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었기에, 이 때의 만남은 서로의 기싸움이 되는 중요한 미팅이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에릭 슈미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노벨에서 내린 결정에 대한 기술적 비판을 합니다.  노벨이 전략적으로 인터넷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한 프록시 캐시(proxy cache)라는 기술이 결국 초고속 인터넷이 늘어나게 되면 무용지물이 될텐데 쓸데없는 곳에 투자를 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냐는 날선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에릭 슈미트는 자신의 논거를 앞세워 거세게 반론을 하였는데, 이런 논쟁이 무려 1시간 30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보통의 인터뷰였다면 완전히 실패했을 이런 논쟁이, 결국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에릭 슈미트라는 사람을 구글의 CEO 적임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에릭 슈미트 역시 구글의 이런 문화가 싫지 않았습니다.  2001년 2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에릭 슈미트에게 정식으로 구글의 CEO 자리를 제안하였고, 에릭 슈미트는 노벨의 합병을 마무리하고 구글의 CEO 를 맡는 대신 3월 부터 일단 회장의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해 8월 에릭 슈미트는 구글의 CEO 자리에 오르면서, 세루게이 브린이 기술부문 사장을 맡고 래리 페이지가 제품부문 사장을 맡는 구글의 3두체제가 완성됩니다.  이때 정해진 연봉과 함께, 에릭 슈미트는 1500만 주에 육박하는 엄청난 주식을 스톡옵션으로 받으면서 구글의 명실상부한 공동책임자가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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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IT 삼국지 주인공은 구글 왕국의 데이터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구글 발전소장인 짐 리스(Jim Reese)입니다.


예일대 출신의 신경외과 의사, 컴퓨터에 빠지다.

짐 리스는 구글이라는 기업의 뇌 이면서 동시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십 만대의 클라우드 컴퓨팅의 엔진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정보발전소장으로, 그의 공식직함은 구글의 최고 운영자 (Chief Operating Officer) 입니다.  짐 리스는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습니다.  의사면허를 받은 짐 리스의 미래는 임상에서 활동하는 의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신경외과 의사로 일을 했는데, 인근에 있던 로봇 수술과 미래형 수술방과 관련한 여러 가지 첨단 연구로 유명한 SRI International에서 그의 의학적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게 됩니다.  그가 SRI International에서 맡은 역할은 신경학적인 의학적 지식과 컴퓨터 과학 컨설턴트입니다.  주로 맡은 일이 인간의 뇌에 대한 자기공명영상(MRI, Magnetic Resonance Image)을 정성적으로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인간의 뇌에 대한 그의 지식과 컴퓨터 과학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짐 리스는 신경외과 의사였지만, 동시에 음반을 낼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습니다.  머리가 워낙 좋은 사람이라 뭐든지 한 번 매달리면 순식간에 그 분야에 최고권위자를 뛰어넘어 버렸다고 하는데, 정말 대단한 천재였다고 합니다.

짐 리스는 구글이 아직 제대로 회사로서의 형태도 갖추지 못했던 시기인 1999년에 구글의 18번째 사원으로 입사합니다.  구글의 무엇이 이 천재를 유혹했을까요?  구글에는 아마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유혹의 단꿀이 묻어있나 봅니다.  어쩌면,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를 만나고 이들의 천재성에 마치 자석이 끌리듯이 끌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구글 정보발전소의 탄셍

구글에 입사한 짐 리스가 맡은 영역은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것이 아닌 하드웨어 시스템의 구축이었습니다.  수 많은 컴퓨터 들을 엮어서 현재의 구글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정보발전소를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짐 리스입니다.

짐 리스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3년 봄, 실리콘 밸리에서 구글의 정보발전소 인프라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이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강연을 하였던 때입니다.  구글에 입사한 지 4년 만에 짐 리스가 IT 산업 전체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짐 리스가 2003년 구글의 인프라에 대해서 설명한 강연은 상당히 유명합니다.  

구글은 짐 리스의 진두지휘로 거대한 정보발전소를 자체 건설하였습니다.  일단 이렇게 무모해 보일 정도의 엄청난 시도가 성공을 하면서, 졸지에 후발주자가 되어버린 야후나 마이크로소프트가 구글의 정보발전소 인프라를 따라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구글에게 미래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구글이 오늘날 이렇게 대성공을 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짐 리스와 같은 천재가 뛰어들어서 마음대로 놀 수 있는 구글의 기업환경일 것입니다.  구글에서 2003년 당시 짐 리스의 직함은 '수석 오퍼레이션 엔지니어 (Chief Operation Engineer)'였습니다.  결국 수 많은 리눅스 서버를 연결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이를 해결하는 것인데,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점검하면서 일일히 버그와 문제점을 바로잡는 어찌보면 무척이나 막노가다에 가까운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경외과 의사이면서 당대 최고의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 어찌보면 막일에 가까운 일에 직접 뛰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이러한 기업문화 ...  그것이 아마도 오늘날의 구글을 만든 견인차가 아닐까요?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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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직원 #1, 크래이그 실버스타인 (Craig Silverstein)


IT 삼국지, 지난 포스팅에 이어 오늘도 구글의 창업과 관련한 이야기 입니다.  


구글의 첫번째 직원, 크래이그 실버스타인

1998년 앤디 벡톨샤임에게 즉석에서 받은 10만달러 수표로 창업에 나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세르게이의 친구이자 인텔의 엔지니어로 일하던 수전 워지츠키가 집주인의 한 명으로 있었던 집의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번째 직원을 뽑았는데, 그가 바로 현재 구글의 기술이사(Director of Technology)를 맡고 있는 크래이그 실버스타인(Craig Silverstein) 입니다.

실버스타인은 10만 달러라는 적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구글이라는 회사에게 최저 수준의 연봉만을 받겠다고 받아들이는 대신, 주식을 요구해서 받았습니다.  그의 이런 선택은 이후 그에게 많은 부를 가져왔지만, 구글이라는 회사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일을 하였고, 집으로 가야되는 날에는 실버스타인이 가지고 있었던 오래된 포르쉐를 타고 퇴근하였다고 합니다.  실버스타인의 포르쉐는 소리도 굉장히 컸지만, 바로 움직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아서 차를 두명의 창업자가 뒤에서 밀고 도로까지 나와야 움직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이 때 3명이 처음 운영하던 시기의 추억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글의 진가를 알아본 현명한 초기 투자자들

그렇지만 10만 달러라는 돈은 사실 이들이 사업을 전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얼마 지나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는 또다른 투자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 때 도움을 얻은 것은 역시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인 제프리 울만의 소개로 만난 엔젤투자자 람 슈리람(Ram Shriram) 입니다.  그는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구글의 두 창업자를 만나 검색엔진을 시험해 보고난 뒤에 자신이 당시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인 야후, 인포시크, 익사이트 등에 매각을 해보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회사를 사지 않을 것이라고 두 명의 창업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람 슈리람에게 한 번 시도를 해보라고 맡기고 몇 개월을 기다립니다.

람 슈리람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인터넷 기업인 야후의 제리 양과 데이빗 파일로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이들은 구글의 검색엔진의 성능에 탄복을 하였지만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검색엔진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검색결과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검색엔진을 채용할 경우 야후 사이트에서 너무 빨리 벗어날 수 있어서 되려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여러 페이지를 보면서 사이트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야 페이지 뷰가 올라가게 되고, 이렇게 올라간 페이지 뷰가 사이트에 달린 광고단가를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후의 두 창업자의 반응을 듣고서 람 슈리람은 되려 구글이라는 회사가 진정한 투자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미팅에서 돌아온 슈리람은 구글의 회사설립 작업에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직접 25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면서 앤디 벡톨샤임에 이은 두번째 투자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수익모델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혁신의 시기에 자기잠식을 하지 못하는 기업의 미래가 없는 것은 야후가 너무나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세번째 투자자는 앤디 벡톨샤임을 두 창업자에게 소개한 데이비드 체리턴 교수입니다.  

네번째 투자자는 바로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 입니다.  람 슈리람과 아마존의 일로 잘 알고 지내던 제프 베조스는 구글의 두 창업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바로 소개를 해 달라고 해서 만난 뒤에 즉시 수표에 서명을 하고 구글의 투자자가 됩니다.  제프 베조스에 따르면 구글의 두 창업자들의 고객에 초점을 둔 비전에 반했고, 이들의 비전을 믿고 주저없이 투자를 합니다.  제프 베조스에게도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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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동갑나기 창업자, 자유의 수호자 세르게이 브린

구글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1973년생 동갑나기 입니다.  1977년 애플 II 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1973년 구소련 연방 시절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계이지만 부모들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1979년 소련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세르게이 브린의 아버지인 마이클 브린은 원래 우주비행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유태인이라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당시 소련에서 가장 중시되던 물리학과에는 유태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마이클 브린은 수학을 전공하였는데, 대학시절 전과목 A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브린의 어머니인 유진 브린 역시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훗날 NASA 에서 우주의 기후환경을 시뮬레이션하게 되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 태어난 세르게이 브린이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은 8평 남짓한 매우 작은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까지 4식구가 살았는데, 1977년 세르게이의 아버지가 폴란드에서 열린 수학 학회에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소련을 떠나자고 선언을 합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는 사실 모스크바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아들인 세르게이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소련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78년 9월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은 미국으로 떠나기 위한 비자를 신청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두 부부는 즉각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8개월간 세르게이 가족은 아무런 고정수입이 없이 임시로 생기는 일을 아무거나 하면서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만약 이들이 신청한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체가 불투명한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1979년 5월 세르게이 가족은 이민을 허가하는 비자를 손에 받아들고 모스크바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당시 겨우 5~6살에 불과했지만, 그 때의 어려움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든 부모님들의 노력에 대해 매우 감사한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세르게이 가족은 소련을 떠나 미국의 매릴랜드 주에 정착을 하는데, 워낙 똑똑했던 사람들이라 초기에는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지만 결국 아버지는 매릴랜드 주립대학교의 수학교수가 되고, 그의 어머니는 미국 최고의 연구기관인 NASA 의 핵심 연구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워낙 수학을 비롯한 과학연산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했었기 때문에, 세르게이 브린은 9살 때부터 가정용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의 부모님은 당시 비교적 싼 가격에 성능이 뛰어났던 코모도어 64 기종을 구입하였는데(이전 포스트 참고하세요), 세르게이는 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종 게임과 수학공부를 하면서 컴퓨터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수학을 너무 좋아했던 그에게, 1990년 그의 17번째 생일날 그의 아버지는 뜻밖의 선물을 가져옵니다.  바로 친구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2주간 다녀올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세르게이가 조국이었던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부모들의 의지는 세르게이로 하여금 러시아어를 잊지 않고 계속 말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2주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세르게이에게 어렸을 때의 소련연방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적인 모습을 다시 한번 되살리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자유와 개방 등과 관련한 강한 열망은 오늘날까지도 구글의 정신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0년 4월 10일 구글은 중국에서 철수를 합니다.  이 철수 결정은 거의 세르게이 브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CEO인 에릭 슈미트는 상당히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원칙에 입각한 세르게이 브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구글이라는 회사의 모토와 철학이 단순히 거짓으로 치부하고 비즈니스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세르게이 브린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집안에서 태어난 컴퓨터 천재, 래리 페이지

래리 페이지는 미시건 주 이스트 랜싱에서 1973년에 태어났습니다.  래리 페이지 역시 유태인으로, 그의 부모님은 모두 미시건 주립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언제나 컴퓨터와 각종 컴퓨터 과학과 관련한 잡지들이 정신없이 널려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래리 페이지는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숙제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해서 제출하는 유일한 학생으로 주목을 받았고, 언제나 무엇인가를 만들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장점과 좋아하는 것을 잘 알았기에 12살 때에 이미 자신이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자신들의 뒤를 이어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래리 페이지는 미시건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을 하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면서 운명과도 같이 세르게이 브린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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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지난 포스트에 이어 오늘도 변방국가 최고의 장수 한명을 소개합니다.  바로 8비트 최강의 운영체제인 CP/M을 만들었던 게리 킬달(Gary Kildall)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 Inc.)라는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있게 만든 MS-DOS 역시 CP/M의 아류작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였습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리 킬달과 바늘 틈과도 같은 기회를 포착하고 여우처럼 낙아챈 마이크로소프트의 운명은 IBM의 기분에 따라서 결정되고 맙니다.  게리 킬달은 죽을 때까지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하는 오늘의 삼국지 이야기 시작합니다.


시애틀의 컴퓨터 천재, 세계 최초의 PC용 운영체제를 개발하다.

게리 킬달은 여러모로 빌 게이츠와 비교가 됩니다.  그 역시 시애틀 토박이로 대학 역시 시애틀의 명문인 워싱턴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을 나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실리콘 밸리 인근 해안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한 몬터레이의 미국 해군 대학원에서 미해군을 가르치면서 군복무를 대신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인텔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입니다.  그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구입하여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눈여겨 본 인텔은 일과가 마친 이후에 그가 컨설턴트로 일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게리 킬달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UW로 돌아와 1972년 컴퓨터 과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컴파일러의 최적화와 관련된 데이터 플로우 분석방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의 방식은 아직도 현대의 컴파일러에서 이용될 정도로 영향력있는 논문입니다.  인텔과 계속 일을 하면서, 그는 플로피 디스크가 세상을 바꿀 것으로 예측하고 8008과 8080 프로세서를 이용하여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할 수 있는 최초의 고수준 프로그래밍 언어를 1973년에 개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PL/M 입니다.  같은 해 인텔의 8080 프로세서를 이용해서 플로피 드라이브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범용 디스크 운영체제를 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8비트 운영체제를 천하통일한 CP/M 입니다.  애플 II가 1977년 발표되었고, 스티브 워즈니액이 개발한 애플 II의 DOS(Disk-Operating System)인 Disk-II 와 애플 도스가 그보다 약간 뒤에 개발되었음에도 CP/M의 정교함과 편리함을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천재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인텔, CP/M의 대성공

게리 킬달은 CP/M을 개발한 뒤, 자신을 컨설턴트로 써준 인텔에 제일 먼저 데모도 하고 중요성도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텔에서는 CP/M이라는 운영체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개발한 PL/M 프로그래밍 언어와 컴파일러의 판매권만을 사서 시장에 내놓는 우를 범합니다.

인텔이 CP/M을 냉대하자, 게리 킬달은 그의 와이프인 도로시와 함께 Intergalactic Digital Research 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이후 Digital Research, Inc.로 이름을 바꾸고 CP/M 운영체제를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취미잡지에 광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세계 최초의 PC로 간주되기도 하는 Altair 8800을 복제한 IMSAI 8080 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수 많은 회사들이 서로 다른 컴퓨터에 CP/M을 포팅해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킨달이 정립한 개념이 바로 BIOS(Basic Input/Output System) 입니다.  컴퓨터 하드웨어에 내장된 BIOS만 수정하면 CP/M은 어느 컴퓨터에서나 동작을 하였고, 이러한 강점을 등에 업고 CP/M은 8비트 운영체제로서 거의 독점적 위치를 얻게 됩니다.

CP/M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디지털 리서치는 무려 3,000개가 넘는 컴퓨터 모델에서 CP/M을 동작시켰고, 매년 수백 만불이 넘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디지털 리서치가 유일하게 정복을 하지 못한 컴퓨터 모델이 있었으니, 그것아 바로 애플입니다.  애플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애플만의 독자적인 디스크 운영체제를 고수했고, CP/M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Z-80이나 8080과 같은 CPU가 장착된 카드를 사서 확장슬롯에 꽂아야 했습니다.  


IBM PC의 등장과 CP/M, 그리고 MS-DOS 

1980년 컴퓨터 업계의 거인 IBM이 PC 사업을 시작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플로피 디스크가 기본으로 내장된 IBM-PC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 중의 하나가 운영체제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던 빌 게이츠는 IBM 측에 디지털 리서치의 CP/M을 라이센싱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합니다.  이에 따라 IBM은 16비트용 CP/M 운영체제인 CP/M-86을 자사의 기본 운영체제로 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디지털 리서치를 방문합니다.

당시 게리 킬달은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소프트웨어를 다른 파트너 회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떠나면서, 계약은 그의 아내 도로시에게 일임을 하고 갔습니다.  이는 게리 킬달이 흔히 하던 방식인데, IBM의 실무진들은 디지털 리서치와의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와 같이 비밀준수계약을 하기를 원했는데 도로시는 게리 킬달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비밀준수계약을 거절합니다.

이에 단단히 화가난 IBM은 디지털 리서치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시애틀로 돌아온 IBM은 빌 게이츠를 만나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를 개발하거나 대안 운영체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당시 빌 게이츠는 이미 IBM에 BASIC 언어의 인터프리터를 포함한 몇 종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납품하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고, 시애틀에 위치한 한 작은 회사가 CP/M을 복제한 86-DOS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폴 알렌은 즉시 이 운영체제의 사용권을 단돈 5만 달러에 구매해서 IBM과의 협상에 임합니다.  86-DOS는 IBM의 하드웨어에 성공적으로 포팅이 되고, IBM은 이를 PC-DOS로 명명합니다.

PC-DOS를 본 게리 킬달은 이것이 CP/M을 복제한 것임을 바로 알게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탓에 게리 킬달은 IBM이 협상안으로 제시한 CP/M-86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중재안에 합의를 합니다.  이에 따라 처음 IBM-PC를 출시하면서 IBM은 운영체제를 별도옵션으로 출시합니다.  PC-DOS를 선택하면 $40 달러를 더 내면 되었고, CP/M-86은 $240 달러를더 내야 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DOS라는 이름 대신 MS-DOS라는 이름으로 IBM의 호환기종에게 운영체제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CP/M-86 역시 다른 호환기종 시장에서 경쟁을 했는데, 오리지널 IBM-PC 모델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MS-DOS의 시장지배력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MS-DOS의 성능과 기술은 CP/M보다 떨어졌고, 버그도 많았지만 워낙 싼 가격을 내세운 MS-DOS가 승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디지털 리서치의 경영에서 손을 떼다.

IBM과의 협상을 통해 게리와 도로시는 자신들의 불찰과 잘못된 경영적 판단을 반성하고, 회사의 직접 경영에서 영향력을 점차 줄여나갑니다.  그러면서, 다양하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CP/M을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도록 진화시켰고, BASIC에 대항하기 위해 Logo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현했습니다.  또한, 애플의 Lisa의 데모를 보고난 뒤에는 GEM(Graphical Environment Manager) 데스크탑이라는 GUI도 개발하였습니다.

결국 게리 킬달은 디지털 리서치를 당시 최고의 네트워크 회사였던 노벨(Novell)에 1991년 매각하고, 자신은 PC의 트렌드를 전하는 공중파 방송활동과 광학 디스크 기술을 컴퓨터에 적용하는 KnowledgeSet라는 회사, 최초의 컴퓨터 백과사전이었던 Grolier's American Academic Encyclopedia, 가정용 PBX 시스템을 이용한 유선전화와 휴대폰을 통합하는 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벤처사업을 하였습니다.


게리 킬달은 언제나 창의적이고 호탕했으며, 모험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비행기 조종, 스포츠 레이싱과 보트를 사랑했고 바다를 사랑하였습니다.  IBM과의 사건 이후에 그는 언제나 빌 게이츠와 비교했으며, 빌 게이츠를 싫어 했다고 합니다.  특히 1992년 자신의 모교인 UW의 컴퓨터 과학 프로그램의 기념일에 초청을 받았는데, 하버드 대학 중퇴 출신인 빌 게이츠가 키노트 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매각을 하고, 그는 텍사스 오스틴 인근의 West Lake Hills라는 곳에 이주를 해서 그가 사랑한 스포츠 카와 비디오 스튜디오, 그리고 자가용 비행기와 보트를 타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그가 사랑했던 도시인 몬터레이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추락해서 사망합니다.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당시 그는 알콜중독으로 많은 시간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 역시 음주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게리 킬달이 이룩한 컴퓨터 과학에서의 업적은 정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 중 중요한 것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 PC 최초의 디스크 운영체제 개발
  •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윈도우 기능을 가진 운영체제 개발 및 소개
  • 메뉴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
  • 최초의 디스크 트랙 버퍼링 스키마, Read-ahead 알고리즘, 파일 디렉토리 캐쉬, RAM 디스크 에뮬레이터의 개발자
  • 1980년대 바이너리 리컴파일러를 처음으로 소개
  •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처음으로 동작하는 컴파일러 및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
  • 오늘날 쌍방향 멀티미디어 기술의 기초가 된 최초의 비디오 디스크에 대한 비선형 플레이가 가능한 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
  • 세계 최초의 소비자용 CD-ROM에 대한 파일 시스템 및 데이터 구조 개발
  • 컴퓨터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개방형으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 아키텍처를 위한 BIOS 개발

그는 진정한 PC의 혁명가였고, 오늘날의 혁명을 있게 한 최고의 과학자였습니다.  비록 신은 그에게 빌 게이츠와 같은 명성과 부를 주지 않았고, 경영능력도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Wikipedia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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