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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II, 새로운 세상을 열다.

스티브 잡스의 직관과 추진력,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걸출한 엔지니어, 그리고 마이크 마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볼 줄 알았던 젊은 엔젤 투자자와 경영능력, 마지막으로 레지스 매키너라는 당대 최고의 마케터가 같이 뭉친 애플 II 는 세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당대 최고의 컴퓨터 회사였던 IBM의 CEO인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수요는 매년 5대 정도면 충분하다는 논리를 폈고, Altair 8800 이 나오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가능성을 비추면서 젊은 사업가들이 세상이 바꿀 것이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여겼습니다.  또한, IBM과 함께 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DEC의 CEO인 켄 올슨(Ken Olsen) 같은 사람은 가정에 어째서 컴퓨터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면서 PC 사업을 쓸데없는 사업 정도로 여겼습니다.  애플을 비롯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나은 기술인력과 네트워크, 자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결국 애플 II 의 대성공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IBM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DEC는 결국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에는 회사가 매각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애플 컴퓨터 역시 스티브 잡스가 아닌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획의 전권을 쥔 엔지니어 마인드로 접근했다면 비슷한 결과를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아타리 컴퓨터에서 여러 작업을 하면서 컴퓨터가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으며, 게임을 비롯한 여러가지 용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사용하기 편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으며, 마이크 마큘라나 레지스 매키너와 같은 동료들도 그런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컴퓨터 회사들과 차별화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런 사용자 편의적이고 즐거운 인생에 도움을 주는 도구라는 개념은 애플의 역사를 타고 도도히 이어져서 현재의 애플 컴퓨터가 만드는 제품들도 잘 살펴보면 개인의 인생과 생활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철학들이 담겨져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플 II의 성공을 이끈 킬러앱, 비지캘크(VIsiCalc)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또다른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이 공동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는 컴퓨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 입니다.  이 소프트웨어 하나로 애플 II는 단순한 가정용 컴퓨터 기기를 너머서 기업에서도 꼭 필요한 컴퓨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Picture from Wikipedia


1978년 하버드 MBA 과정에 있던 댄 브리클린은 전통적인 종이 스프레드 쉬트를 이용하여 교수가 강의를 할 때, 교수가 하나의 셀에서 실수를 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모든 셀의 값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훨씬 생산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력이 있어야 하는 법 ...  브리클린은 베테랑 프로그래머인 밥 프랭스턴을 고용합니다.  당시 컴퓨터가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컴퓨터를 가진 사람들을 수소문하는데, 이 때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 였습니다.  애플 II에는 당시 정수베이직(Integer Basic)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밥 프랭스턴은 이 언어를 이용해서 데모 프로그램을 구현합니다. 

브리클린에게 애플 II를 빌려준 사람은 Personal Software사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 였습니다.  그 역시 애플 II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컴퓨터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게 자사의 체스 프로그램을 애플 II 용으로 포팅하겠다고 하고 매우 싸게 애플 II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지캘크가 애플 II용으로 개발된 것에는 이렇게 대단한 행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댄 필스트라는 브리클린과 밥 프랭스턴이 구현한 데모를 보고 즉시 제품개발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비지캘크를 발표한 Software Arts 입니다.  

비지캘크는 소프트웨어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기록한 제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자 최초의 스프레드 쉬트입니다.  비지캘크가 정형화한 스프레드 쉬트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애플 II는 하드웨어 사양에 있어, 폭으로 글자를 40자(40 컬럼)만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좌우폭의 한계 때문에, 비지캘크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는데, 애플에서는 이를 80컬럼으로 늘리는 주변장치 카드도 판매하였는데 이 카드의 판매량도 비지캘크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지캘크는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100 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립니다.  소프트웨어의 판매가 급성장하자, 애플 II도 번들 전략을 이용해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십 만대의 애플 II 컴퓨터들이 단지 비지캘크를 사용하기 위해서 팔리게 됩니다.  

비지캘크의 성공은 또다른 업무영 소프트웨어들의 발전을 자극하는데, 그 유명한 애쉬턴테이트사의 업무용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인 디베이스(dBase)와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스타(WordStar) 등이 PC 용으로 개발되어 판매가 되었고, PC가 바야흐로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의 첨병으로 대접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최초의 성공자,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댄 브리클린은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의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지캘크의 성공신화는  IBM PC의 등장과 함께 로터스의 1-2-3가 나오면서 저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동업자였던 Personal Software에서 1983년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결국 Software Arts는 로터스에 매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 특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소프트웨어 부분의 특허는 쉽지가 않습니다). 

비지캘크는 사무혁명을 일으킨 소프트웨어이자, 기업의 OA(Office Automation)라는 것을 처음으로 대중화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일종의 기계로 바라보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도 비지캘크의 공입니다.  애플 II는 비지캘크를 무기로 당시 난립하고 있던 가정용 PC 시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애플도 대단히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댄 브리클린이 비지캘크를 개발할 때, 애플 II 컴퓨터가 아니라 당시 경쟁을 하고 있는 라디오쉑(RadioShack)의 TRS-80이나 코머도어 같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PC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까요 ...

그런데, IBM PC의 등장과 함께 시장을 지배하던 로터스 1-2-3 역시 시장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현재 잘 나가고 있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혁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긴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법입니다.


애플 II의 또 하나의 성공전략, 게임과 교육

애플 II의 성공에 직장에서는 비지캘크가 큰 역할을 했다면, 가정에 보급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게임과 교육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게임회사에 다녔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개발한 정수 BASIC을 게임 BASIC이라고 부를 정도로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해상도 그래픽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당시 경쟁대상이었던 어떤 컴퓨터 보다도 게임을 지원하기 위한 여건이 뛰어났습니다.

특히, 애플 II 는 다른 컴퓨터와는 달리 RF 모듈레이터라는 것이 있어서 컬러 TV에 연결이 가능해서 컬러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 애플 II+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 전용 모니터를 사지않고 TV를 연결해서 이용했었는데, 컬러 TV에 연결해서 즐기던 게임들은 다른 어떤 PC들보다 우수하고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지캘크를 통해 사무실을 장악한 애플 II가 또 하나의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 시장은 교육시장이었습니다.  애플 II는 아이들의 학습도구로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대규모 캠페인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 컴퓨터 한대 정도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특히 캘리포니아주 모든 학겨에 애플 II 컴퓨터를 한 대씩 무료로 기증하는 과감한 행보와 함께, 광고로 애플 II 컴퓨터로 학교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통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컴퓨터 교육과정이 정규과정으로 편성이 되면서,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더욱 익숙했던 애플 II는 자연스럽게 다른 경쟁 컴퓨터들을 제치고 부모들이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주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에 컴퓨터를 한 대씩 장만하는 투자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렇게 애플 II 가 급속도로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당시 큰 인기를 끌던 가정용 게임기가 우수한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를 통해 붕괴되는등 만만치 않은 산업적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컴퓨터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프린터도 판매가 되면서 EPSON 등과 같은 라인 프린터 회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또한 애플 II 의 성공에 자극받아서 많은 수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코모도어 64라는 제품을 앞세웠던 코모도어사는 1700~2500만대 정도의 컴퓨터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결국 IBM 이라는 거인이 PC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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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다.

1977년 애플 II 가 출시될 당시, PC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소프트웨어는 BASIC 언어를 해석해서 실행을 해주는 인터프리터였습니다.  애플 II 에는 스티브 워즈니액인 만든 정수 BASIC (Integer BASIC) 이라는 인터프리터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 BASIC 언어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실수에 대한 처리와 일부 문자열 처리를 하는데에 문제가 있어서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7~1979년 6월까지 정수 BASIC 은 애플 II 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BASIC 인터프리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로 인하여 애플은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BASIC 인터프리터를 제공하기를 원했는데, 그 파트너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선택합니다.

앞선 연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이크로소프트는 1975년 이후 BASIC 인터프리터 개발과 관련해서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976년 중반 마이크로소프트의 첫번째 직원인 마크 맥도널드(Marc McDonald)는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6502 를 이용한 PC는 애플-1 밖에 없었고 애플 II 가 출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티브 잡스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새로운 BASIC에 관심이 없는지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렇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스티브 워즈니액이 만든 정수 BASIC 이 있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자신들은 이미 BASIC을 가지고 있다면서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맥도널드는 6502용 BASIC을 그냥 만들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애플 II 를 출시하면서 탑재한 정수 BASIC의 성능에 대한 불만족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수정요구가 많아 졌지만, 혼자서 BASIC 을 개발한 스티브 워즈니액은 새로운 DISK II 라는 인터페이스 카드를 디자인하느라 BASIC을 손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1976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안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새로운 BASIC을 만들어 줄 수 없냐고 1977년 8월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접촉합니다.  1977년 8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0년간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6502 BASIC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수정하는 권한을 애플이 가지는 것으로 $10,500 달러짜리 개발계약을 맺게 되는데,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10월 코모도어의 PET에 탑재되는 ROM BASIC을 개발하는데 역량을 많이 썼음에도, 하드웨어 제작 및 판매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인 자금의 경색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드웨어 판매당 로열티 방식으로 하던 계약을 고집하지 않고 일반 개발계약에 동의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새로 만드는 BASIC이 기존에 만들어둔 BASIC을 약간만 손을 보면 되는 수준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고, 애플에서 그 이후의 수정개발을 랜디 위긴턴과 같은 자사의 엔지니어를 통해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는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 계약은 협상의 귀재인 빌 게이츠 답지 않게 애플 II의 대성공의 과실을 같이 많이 누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BASIC의 이름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름을 따서 애플소프트 BASIC(Applesoft BASIC)으로 결정되고, 1977년 11월 카세트 테이프에 담겨져서 처음으로 출시됩니다.

이처럼 처음으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벌였던 줄다리기(?)와 협력에서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판정승을 거둡니다.  일반적인 로열티 계약 대신에 자사의 엔지니어를 투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10년간 마음대로 고쳐쓸 수 있는 계약을 이끌어낸 스티브 잡스도 대단하지만,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도 회사 초창기 돈이 궁하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인간적(?)인 면도 보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애플소프트 BASIC II와 애플 II+ 출시

초창기 애플소프트 BASIC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테이프로 로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프로그램을 돌리더라도 컴퓨터를 껐다켜면 BASIC을 다시 로드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돌려야 했습니다.  또한,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쓰기 위한 메모리 영역을 침범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픽 언어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처리할 수 있는 BASIC은 애플소프트 BASIC 밖에 없었기에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 개발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78년 봄, 랜디 위긴턴과 애플의 동료들은 애플소프트 BASIC을 업그레이드 합니다.  버그도 고치고,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쉽게 쓸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도 하면서 "애플소프트 BASIC II"를 출시합니다.  이 BASIC은 카세트 테이프와 RAM, 펌웨어 카드 ROM, 언어카드 ROM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출시가 되는데, 언어 자체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특히 ROM 으로 출시한 것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면서 소비자들은 애플소프트 BASIC을 본체에 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침내 애플 II의 메인보드에 기본으로 탑재하도록 결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애플 II+ 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애플 II+ 는 애플 II와 큰 차이는 없지만 무엇보다 애플소프트 BASIC이 메인보드에 ROM으로 기본탑재가 되었고, RAM의 가격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에 기본 메모리를 48KB로 늘립니다.  또한, 일부 문제가 있었던 버그를 고치고, 메인보드의 디자인도 업그레이드한 뒤에 1979년 6월 애플 II+를 출시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애플 컴퓨터 복제회사들이 원형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애플 II+ 입니다.  일부 컴퓨터는 16KB의 RAM을 더 탑재해서 64KB 로 내놓기도 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1983년 애플 II 호환기종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구입했는데, 이 역시 16KB RAM이 확장된 애플 II+ 호환기종이었습니다.


애플 II, 마이크 마큘라 그리고 레지스 매키너

애플 II의 탄생에는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과 함께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와 레지스 매키너(Regis MacKenna)의 공이 컸습니다.  애플-1에서 약간의 성공을 했지만, 하드웨어 사업을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스티브 잡스는 자금을 지원해줄 사람을 찾아다니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먼저 전 직장인 아타리의 사장 놀란 부쉬넬을 찾아가 투자를 부탁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잘 나가던 아타리와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자금난을 겪고 있었기에 놀란 부쉬넬은 아타리의 투자자인 돈 밸런타인(Donald Valentine)을 소개합니다.  돈 밸런타인은 실리콘 밸리의 영향력있는 벤처 캐피탈의 할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아직도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세코이어 캐피탈(Sequoia Capital)을 1972년에 설립한 사람입니다.  돈 밸런타인은 편집증 환자에 전혀 격식이라고는 없었던 스티브 잡스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스티브 잡스가 끈질기게 찾아가자 돈 밸런타인은 인텔에서 큰 돈을 벌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에게 일을 떠 넘깁니다.  

돈 밸런타인의 부탁을 받은 마이크 마큘라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스티브 잡스를 따라서 애플의 본거지였던 스티브 잡스의 차고를 찾아갔다가 스티브 워즈니액이 개발 중이던 애플 II를 보고서 바로 성공을 직감합니다.  그는 즉시  $25만 달러의 투자를 결정하는데, $8만 달러로 애플주식의 1/3을 사들이고, 나머지 $17만 달러는 싼 이자로 대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애플의 3번째 직원이 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인텔이라는 성공적인 벤처 회사의 마케터로 일했던 그는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을 도와 애플을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사장으로 내셔널 세미컨덕터에서 마이클 스캇(Michael Scott)을 앉히고, 그 밖에 여러 인재들을 합류시켰으며, 동시에 돈 밸런타인을 포함한 여러 투자자들까지 설득해서 애플의 재정이 문제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레지스 매키너는 실리콘 밸리에서 1970~80년대 최고의 홍보전문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애플 II의 성공을 위해 레지스 매키너와 같은 홍보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스티브 잡스는 돈 밸런타인을 찾아갔을 때처럼 끊임없이 구애를 하면서 레지스 매키너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애플 II와 함께 나온 애플 II를 대표한 6색 사과 로고가 바로 그의 첫번째 작품으로 컴퓨터에 컬러를 제공한다는 느낌과 함께 베어먹은 금단의 사과의 느낌이 나는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스티브 잡스가 처음에는 이 디자인을 거부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에는 그 뒤로 수십 년간 애플을 대표하는 로고가 됩니다.

이처럼 애플의 초창기 성공에는 스티브 잡스의 끈질긴 집념과 마이크 마큘라와 같이 성공할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하는 엔젤 투자자들, 그리고 회사의 약점을 메꾸어 주었던 뛰어난 관리인력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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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전설적 컴퓨터 모임, 홈브루 컴퓨터 클럽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전자제품 매니아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클럽은 다양한 전자관련 부품들이나 회로, 그리고 정보를 교류도 하고, 컴퓨터 관련 장비를 직접 조립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는데, 고든 프렌치(Gordon French)의 차고에서 1975년 첫 모임을 가지고 비정기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의 멤버들은 아직도 정기적인 미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이들의 수준은 정말 당대 최고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Altair 8800 컴퓨터가 나온 뒤에는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으며, 가끔씩 발행하는 뉴스레터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만드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라는 아이디어를 확산시키고 후에 애플 컴퓨터가 출범하게 되는데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였습니다.

이 컴퓨터 클럽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스티브 워즈니액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하드웨어 디자인, 조립실력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으로 클럽 멤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애플 컴퓨터, 드디어 깃발을 올리다.

이렇게 새로운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티브 워즈니액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컴퓨터를 설계하고,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 로널드 웨인(Ronald Wayne)과 함께 3명이서 애플 컴퓨터의 깃발을 올립니다.  로널드 웨인은 아타리에서 스티브 잡스와 일을 했었고,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술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애플 로고도 그리고, 애플-1 의 매뉴얼을 작성하는 작업과 각종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의 실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애플의 주식 10%를 가졌는데, 2주 뒤에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800에 자신의 주식을 매각하고 애플을 떠납니다. 웨인은 당시 상황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지만, 현재의 애플이라는 회사의 가치를 생각하면 아마도 마음이 많이 상할 것 같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스티브 잡스의 차고에서 만든 애플 I 퍼스널 컴퓨터 키트를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애플-1 은 Altair 8800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는데, 내부에 확장 카드를 꽂을 수 있도록 하였고, $25 정도하였던 MOS 6502 라는 CPU를 가졌으며, 256 바이트의 ROM과 4K~8K 바이트 RAM을 가졌습니다.  디스플레이 컨트롤러는 40열에 24개의 행을 표시할 수 있었는데, 케이스나 파워, 키보드, 디스플레이 등도 없이 보드만 판매하는 형태였습니다.  사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컴퓨터에 Altair 가 사용한 인텔의 8080 칩을 쓰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격이 무려 $179 달러나 하였기 때문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모토롤라의 6800 을 고려하였지만, 역시 최고로 낮출 수 있는 가격이 $175 달러나 하였습니다.  결국 애플이 이름없는 회사의 기능도 많이 떨어지는 CPU인 6502를 채택한 것에는 월등히 싼 가격이 한 몫을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6502는 6800 CPU와 상당히 기능적으로 비슷하였고, 4KB RAM 에 올라가서 동작하는 BASIC 인터프리터를 만들어서 올리고 판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 밸리의 여러 컴퓨터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애플 컴퓨터를 보여주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은 $666.66 달러로 결정하였는데, 그 의미와 애플의 로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이 연재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제품을 주문한 곳은 바이트(Byte) 라는 가게를 새로 열려고 했던 폴 터렐(Paul Terrell) 이었습니다. $500 달러에 50대의 애플-1을 구매하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애플이 100대를 제작할 수 있는 부품을 구하기 위한 자본금이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팔았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아끼던 HP의 최고급 공학용 전자계산기까지 팔았지만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는 특유의 영업력과 화술로 부품을 공급하는 가게들에게 신용으로 상당부분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으며, 추가로 은행에서 $5,000 달러의 빚을 얻어서 부품을 구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뛰어난 기술자였지만, 사람들하고 협상을 하거나 계약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고, 그냥 컴퓨터와 기술이 좋아서 그것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 비해, 스티브 잡스는 재능있는 사람과 가능성을 볼 줄 알았고, 처음보거나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설득할 수 있는 화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컴퓨터를 기획하다.

애플-1 은 200대 정도가 제작이 되었고, 약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대부분 판매가 됩니다.  애플-1 은 Altair 와 비교했을 때 그래도 사용하기 편리한 편이었지만, 조립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BASIC을 이용하게 만들려면, ROM에 3K 정도 되는 16진수 바이트 코드를 입력해야 했는데, 적어도 20~30분 정도는 소요가 되는 작업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이래서는 매니아들을 위한 컴퓨터는 될 수 있어도,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쓰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을 위한 컴퓨터로서의 자격은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애플-1 을 추가로 생산하기 보다는 사용자가 사용하기 편리한 형태의 컴퓨터 기술들을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는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초기 애플-1 판매에 큰 도움을 준 바이트 샵의 폴 터렐이 소비자 입장에서 원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여러가지 기능개선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카세트 테이프에 저장과 불러들이기가 가능하도록 카세트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고, 마더보드에 추가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워즈니액이 만든 BASIC 언어를 담아서 팔기 시작했으며, 폴 터렐은 나무로 만든 박스에 마더보드를 넣어서 애플-1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애플 II 는 처음부터 예쁜 플라스틱 케이스와 키보드가 통합된 형태로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스티브 워즈니액이 스티브 잡스와 아타리에서 진행했던 벽돌깨기(Breakout) 프로그램을 동작시킬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컬러를 지원하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라인을 그리고, 컬러를 바꾸는 등의 새로운 BASIC 언어들과 루틴들을 추가하고 동시에 소리를 내기 위한 사운드 작업과 본체에 스피커까지 달게 됩니다. 이처럼 애플 II는 게임을 좋아했고, 벽돌깨기 게임 프로젝트를 사랑했던 스티브 워즈니액에 의해 게임을 즐기기 쉬운 컴퓨터로 재탄생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향후 애플 II 용으로 수많은 컴퓨터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애플 II가 PC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RAM 의 증설에도 신경을 썼는데, RAM 의 크기에 따라 다양한 가격의 제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4KB 부터 최대 48KB 까지 메모리를 설치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척 우스운 크기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커다란 메모리 용량이었습니다.  16KB 의 RAM이 1977년 당시 $500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가격의 압박요소가 되었는데, 경쟁사였던 코모도어(Commodore)의 PET나 라디오쉑(Radio Shack) 의 TRS-80 의 경우에는 개방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향후 확장이 가능하도록 마더보드를 제작함으로써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II 에 8개의 확장 슬롯을 설계해서 마더보드에 통합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경쟁제품들에 비해 강력한 차별점으로 부각되는데, 수많은 주변기기 제작회사들이 다양한 확장카드들을 만들면서 애플의 전성시기를 열었습니다.  사실 이때에도 스티브 잡스는 프린터와 모뎀을 위한 확장슬롯 2개 정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며, 쓸데없이 제작비만 올리게 된다며 반대했지만 워즈니액은 HP 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성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8개의 슬롯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어렸을 때 애플 II 를 이용했는데, 애플의 개방형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는 정말 강력한 생태계를 구성했고, 애플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개방형 철학에 대해 처음부터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애플 II가 그렇게 개방적인 컴퓨터가 되었던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의 영향력이 당시에는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과는 달리 애플 II 가 정말 다른 컴퓨터들과는 차별화된 다른 모습을 가진 컴퓨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스케치와 모형을 만들어 가면서, 기존의 각이 진 육면체 형태의 모습을 탈피한 새로운 컴퓨터의 모습을 디자인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제품 매니아들처럼 부품을 구해서 조립을 하거나, 케이스가 있어도 상자같은 형태에 나사가 여기저기 보이는 등 예쁘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비대칭이면서도 날카로워 보이고, 기능성도 겸비한 케이스를 원했고, 나사가 하나도 겉에서 보이지 않는 케이스를 디자인하였습니다.  나사는 모두 바닥에 위치를 시켰고, 또한 누구나 쉽게 보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컴퓨터 케이스 뚜껑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확장슬롯에 카드를 새로 꼽는 작업이 간편한 디자인을 멋지게 해냅니다.  또한 키보드의 컬러와 파워, 냉각팬 등에도 대단한 신경을 썼습니다.  아타리에서 같이 일했넌 로드 홀트(Rod Holt)라는 아날로그 회로 전문가를 고영해서 경량의 파워와 냉각팬을 디자인하였는데, 그의 경량 파워 서플라이와 TV와의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만든 디자인은 애플 II의 경쟁력을 한층 높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애플 II 의 디자인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고,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외관역시 애플 II의 대성공에 한 몫하게 됩니다.


from Flickr by Marcin Wichary


이렇게 당대 최고의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가 각자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최대한 발휘하여 완성한 애플 II 컴퓨터는 1977년 4월 일반에 공개가 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애플의 로고와 함께 전세계가 PC 열풍에 빠져들게 만들게 됩니다.




(... 후속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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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뇌리에 박힌 한편의 강의

1972년 스티브 잡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 오레곤에 위치한 리드대학(Reed College) 물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것은 자신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내세웠던 대학교육을 위해서 양부모들이 모아둔 저축을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한 학기 만에 다 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면서 2년간 자신이 원하는 여러 수업을 들으러 다닙니다.  그 중에서 그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강의가 있었으니, 바로 서체 디자인(calligraphy) 입니다.  후에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에 대학시절 수강한 서체 디자인 강의에서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10년 뒤 매킨토시에 구현하면서 전자출판 혁명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대학에서 중퇴하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지정하거나 졸업에 필요한 강의를 위주로 들었을 것이며, 마음이 끌리는 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이기에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처럼 엔지니어라고 하기에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디자인 서체 강의를 도강하면서 서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어갔으며, 그 서체 속에 숨어있는 역사와 세상의 일부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가 스탠포드에서 행한 짧은 14분 남짓되는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그의 인생의 열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꼭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글자막이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여력이 되신다면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문자막이 있는 영상 임베딩합니다.

 


아타리 컴퓨터를 찾아간 기인

1974년 스티브 잡스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 배짱좋게 당시 실리콘 밸리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Atari)의 문을 두들깁니다.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아타리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게임으로도 유명한 퐁(Pong)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벤처기업으로 성장 중이었습니다.  이 게임에 매료된 스티브 잡스는 무작정 아타리의 직원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1974년 가을 아타리를 찾아간 스티브 잡스의 모습은 냄새나는 수염투성이에 장발을 한 더러운 히피(hippie)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전해집니다.  회사의 경비원은 무작정 회사를 찾아와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스티브 잡스를 보고, 부랑자가 찾아왔다면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당시 아타리의 경영진으로 일하고 있었고, 퐁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앨런 알콘(Allan Alcorn)은 18세의 스티브 잡스가 HP에서 일했고,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해박한 것을 알게 되어 시간 당 $5 달러에 동전을 넣는 당시의 게임기를 고치는 일에 투입할 요량으로 즉석에서 채용을 결정합니다.  

이 때가 1974년 5월로, 스티브 잡스는 잘 나가는 아타리의 40인의 직원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맨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다른 직원들의 일에 간섭을 하고 이상한 말만 하고 다니는 스티브 잡스는 회사의 기피인물 1호가 되어 버립니다.  이에 앨런 알콘은 하는 수 없이 거의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에만 스티브 잡스가 나와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은 주로 아타리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디자인을 약간씩 변형하는 것이었는데, 회로를 일부 추가하거나, 다른 소리를 집어넣거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야간에 아타리라는 회사에서 스티브 잡스와 희희낙낙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괴짜 스티브 워즈니액입니다.  HP의 엔지니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 역시 아타리의 광팬으로, 심지어는 아타리의 퐁 게임을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만든 자신만의 퐁 게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스티브 워즈니액을 아타리 본사로 불러들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실력을 동료들에게도 자랑을 하였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의 재능을 알아본 앨런 알콘은 그를 아타리에 스카웃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꿈인 전자계산기를 HP에서 만드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은 그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를 따라 밤마다 아타리를 찾아서 여러가지 일을 같이 (아니 거의 스티브 워즈니액이 도맡아 해결했다고 합니다) 해결하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쉽게 해결을 하자 아타리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까지 스티브 잡스를 주목하게 됩니다.  6개월 정도 아타리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시절부터 심취해 있던 인도로의 영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회사의 수뇌부들에게 자신에게 인도여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신참내기 직원의 황당한 요구에 당황한 앨런 알콘과 놀란 부쉬넬은 때마침 독일에서 터진 아타리의 게임기 문제를 독일에서 해결한다면 인도로의 여행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짐을 싸서 독일로 날아가서 단 2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리드 대학을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동시에 향후 애플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는 댄 콧케(Dan Kottke)와 함께 6개월간의 인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독일에서의 문제는 앨런 알콘이 예상했던 것과 동일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앨런에게 고치는 법을 배웠던 스티브 잡스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수리를 마칩니다.

스티브 잡스의 인도여행은 그의 기대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물질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다는 결심을 한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로 복직을 하는데, 그 때에는 과거의 히피 스타일을 버리고 깨끗하게 삭발과 면도를 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앨런 알콘은 그를 다시 과거와 같이 밤에 일을 시키면서 동시에 친한 친구이자 스티브 잡스의 집에서 같이 살던 댄 콧케에게도 일을 맡깁니다.  


전설의 벽돌깨기 게임의 탄생

이 시기에 아타리는 회사의 여러 게임 프로젝트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때 아타리는 원가절감과 함께 벽돌깨기(Breakout) 게임의 디자인과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내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하나의 TTL 칩(Transistor-Transistor Logic, 당시 아케이드 게임 대부분에 이용되던 칩)을 줄이는 아이디어에 돈을 겁니다.  보통 하나의 게임에 130~170개 정도의 칩이 들어갔는데, 아타리의 목표는 70~100개 정도로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지원을 해서 사내계약을 따내고, 벽돌깨기 게임의 스펙을 받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믿는 구석인 스티브 워즈니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일이었고, 아타리에서 약속받은 금액은 50개의 칩 이하로 설계하면 $700 달러, 40개 이하로 만들면 $1000 달러 였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700 달러의 반을 받고 보너스는 없는 것으로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훗날 스티브 워즈니액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아타리에서는 4일로 시간을 제한한 적이 없었는데, 스티브 잡스가 임의로 설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스티브 워즈니액은 4일 밤을 새면서 손으로 게임보드의 프로토타입을 거의 완성합니다.  워즈니액은 TTL 칩의 수를 46개까지 줄이는데 성공을 하였고, 이들의 성과에 감명을 받은 아타리의 경영진들은 스티브 잡스에게 $5,000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였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원래 약속한 $350 달러만을 주고 오레곤으로 몇 달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런데, 스티브 워즈니액의 디자인은 워낙 컴팩트하고 손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당시의 기계와 아타리의 엔지니어들로서는 양산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들다시피한 이 게임은 워즈니액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많이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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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lickr by Ballistik Coffee Boy


방과후 학교와 HP, 그리고 운명적 동지와의 만남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학교공부에 재미를 붙인 스티브 잡스는 6학년 때에는 한 해를 월반을 해서 바로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의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Cup)와 홈스테드 고등학교(Homestead High School)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실리콘 밸리라는 환경은 그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가 10살 때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보게 되는데, 그것은 NASA가 실리콘 밸리에 만들어 놓은 연구센터에 놓였있던 터미널입니다.  터미널은 독자적으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라고 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유선으로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컴퓨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것을 보자 마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는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이니 정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안되나 봅니다.  

어린 학생이지만, 이미 히스키트를 통해 전자부품들과 조립, 그리고 기계들의 동작원리를 깨우친 그는 약간 떨어진 팔로알토에 위치한 HP(휴렛 패커드, Hewlett-Packard)에서 주최하는 방과후 강의에 짬이 나는대로 참여를 합니다.  특히 전자제품 조립에 취미가 많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HP 창업자인 휴렛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수십 분간의 설득을 통해 원하는 부품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위대한 엔지니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k) 입니다.  방과후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어린 학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당시 HP와 같은 벤처회사라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HP에서는 스티브 잡스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 방학인턴을 제의하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방학 때 HP에서 실제로 일을 시작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1950년 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5살이 많습니다.  정말 희대의 독특한 괴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흔히 "워즈(Woz)"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현재도 세계적인 방위산업체로 이름이 높은 록히드 마틴 사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과 희한한 기계들을 만드는 것에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UC 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평생동안 엔지니어로서 기계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휴학을 하고 HP에 취직을 합니다.  HP와 동네에서,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로서 워낙 기계를 좋아하는 독특한 괴짜들이 둘이 만났으니 이들이 금방 친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입니다.  


희대의 장난꾸러기들 교황청을 노리다.

1971년 스티브 워즈니액은 'Blue Box' 라는 장치를 만듭니다.  전화회사 시스템의 특성을 분석한 뒤에, 전화선에 접속해서 돈 한푼 없이 전화를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스티브 워즈니액은 워낙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라 이 장치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장난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고등학생 스티브 잡스는 직감적으로 돈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부품을 $40 달러 정도에 사서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더 만들어 달라고 한 뒤에 이를 스티브 워즈니액이 다니던 UC 버클리 학생들에게 $150 달러에 판매를 합니다.  

특히 판매를 하기 위해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난전화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이 당시의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를 흉내내면서 바티칸 시티에 전화를 해서 교황과 통화를 시도한 사건입니다.  교황이 잠을 자고 있었기에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강심장이었던 워즈니액이었지만 바티칸에서 이를 믿고 교황을 깨우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덜컥나서 먼저 끊었다고 합니다.  


from Flickr by ekai


똑똑한 천재소년과 컴퓨터의 운명적 조우

스티브 잡스에 비해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 한번 본 것은 모조리 외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백과사전이나 성경책 등을 통째로 외우고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11살이 되던 해에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합니다.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학교로 시애틀의 유명한 사립학교인데 동부의 명문대학의 등록금보다도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 학교이고 그만큼 시설도 좋았습니다.  학교의 교육방식도 굉장히 엄격했는데, 이런 환경에 빌 게이츠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항적인 행동이 많아서 결국에는 아동심리치료까지 받게 되는데, 다행히 심리치료사에게 마음의 안정을 얻고 학업에 복귀해서 잘 적응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에게서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고서 엄청난 양의 독서가로 변신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있었다면, 빌 게이츠에게는 심리치료사가 있었습니다.

1968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만남이 있게 됩니다.  레이크사이드 스쿨의 부모회에서 주최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 컴퓨터 단말기를 들여놓게 되는데, GE사의 ASR-33 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가 매우 드물었고, 시애틀에서는 레이크사이드가 최초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는  PC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메인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컴퓨터가 외부에 있고, 이 컴퓨터에 연결이 가능한 터미널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이들 간의 연결은 전화선으로 되어 있었고,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추가로 내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시간 당 40달러나 되는 요금을 감당할 수 있었던 학교의 환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빌 게이츠는 폴 알렌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컴퓨터 단말 앞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됩니다.  컴퓨터 단말기 앞에서 선생님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닦게 된 그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과도한 컴퓨터 사용량으로 인해 초기에 확보한 예산이 단 몇 주만에 동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학교에서의 컴퓨터 사용이 금지되었는데, 이미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된 이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실력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A young Bill Gates and Paul Allen by SplaTT.
from Flickr by SplaTT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모아서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들은 메인프레임 컴퓨터 임대와 판매를 하는 인근 회사에 찾아가서 프로그래밍과 프로그램에서 버그를 찾는 일을 하는 대신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야간에 쓸 수 있는 허락을 얻어내어 컴퓨터를 마음대로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사도 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폴 알렌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시애틀의 명문대학인 워싱턴 주립대학교(UW,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워낙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비록 고등학생들이지만 일거리를 주는 곳들이 생겨납니다.  특히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를 통해 만든 급여관리 프로그램의 경우 빌 게이츠가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서 3개월간의 작업을 통해 1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에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정식으로 창업을 합니다.  이 때에는 아버지가 직접 도와주게 되는데, 회사의 이름은 "TRAF-O-DATA" 입니다.  외부에서 용역을 받은 일로도 돈을 벌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관리 프로그램의 제작을 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을 한 빌 게이츠는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으로 둘러싸여 지내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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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동거 중인 대학원생 부모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온 가난한 대학원생들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던 이 젊은이들은 아이가 태어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입양기관에 아이를 넘깁니다.  아이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터전을 둔 한 기계공 부부에게 입양이 되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 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가족은 그가 5살 때 마운틴 뷰(Mountain View, 오늘날 구글 등의 본사가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애플이 탄생하게 됩니다.


과수원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도시가 되는 환경속에 자라다.

캘리포니아의 북부 샌프란시스코만의 남부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는 스탠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주변의 라디오와 TV, 그리고 군에 납품을 하던 여러 전자부품 회사들을 중심으로 초창기 성장을 하였습니다.  1940~50년대 스탠포드 대학의 공대 학장이었던 프레데릭 터만(Frederick Terman)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창업을 장려하는데, 이런 정책 속에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가 HP(Hewlett-Packard) 입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반도체와 전기/전자 관련한 하이테크 회사들이 나타나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대표하는 기술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벨 연구소를 1953년에 떠난 쇼클리(Shockley)가 1956년 창업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통해 당시 트랜지스터를 게르마늄보다 실리콘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는 확신 속에 여러 연구를 진행하였으나 자신의 회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이 회사의 엔지니어 8명이 창업한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 그리고 그 중에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창업한 인텔로 뿌리가 이어지면서 실리콘 밸리의 신화가 가속화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학창시절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였다고 한다.  학교도 다니기 싫어해서 결석을 많이 하였는데,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  그것은 히스키트(Heathkit)라는 아마추어용 전자공학 키트였습니다.  그의 양아버지도 기계공학을 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5~6세 일때 이미 그에게 작은 워크벤치와 도구들을 주면서 언제라도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여기에 HP에 다니던 동네 아저씨가 건네 준 히스키트와 마이크, 스피커와 같은 다양한 재미있는 기계들에 대한 설명과 경험은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를 만들게 한 열정과 자신감을 선사하게 된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DNA를 이끌고 있는 멋지고 창의적인 하드웨어에 대한 열정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동갑나기 라이벌

스티브 잡스와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빌 게이츠는 1955년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유력한 은행들의 이사진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네셔널뱅크(national bank)의 총재였으니, 태어날 때부터 빌 게이츠는 법과 경제라는 현재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에 대해 익숙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다소 평범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 밸리 한 가운데에서 자라면서 신기한 물건들과 기계들을 접하면서 자랐는데에 비해, 빌 게이츠는 13살이 되어 레이크사이드 스쿨(중/고등학교 통합 사립학교)에 들어가서 컴퓨터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게 되는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컴퓨터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것이었고,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DNA가 되었습니다.

(후속편으로 이어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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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뉴욕타임즈의 데이빗 포그(David Pogue)가 스티브 잡스와 인터뷰하면서 밝힌 뒷이야기가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물론, 데이빗 포그가 뉴욕 타임즈에 올린 글이 시발점이 되었지만요 ...  내용을 보면 애플이 태블릿에 들이고 있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책만 읽지는 않는다.

스티브 잡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더이상 '책만을 읽기 위해' 비싼 물건을 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애플의 전략은 여러 인쇄 기반의 여러 미디어 관련 회사들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디바이스(애플 태블릿)에서 컨텐츠를 볼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미 협상은 시작되었고, 이러한 컨텐츠는 단순히 전자책과 잡지 뿐만 아니라 훨씬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으며, 인쇄라는 것의 문화 자체를 재정의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아이튠즈가 크게 바뀔 것 같습니다.  음악과 비디오라는 멀티미디어 컨텐츠를 중심으로 했던 아이튠즈가 인쇄물을 포함한 다양한 저작물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듯한데, 스티브 잡스는 이미 음악저작권과 관련하여 저작권자들과의 뛰어난 협상과 비젼, 그리고 설득의 실력을 보여준바 있습니다.  비슷한 전략으로 출판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대형 미디어들과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사 중에서는 이미 뉴욕타임즈와 강력한 동반자 관계를 맺고 협업을 시작하였다는 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최근 뉴욕타임즈를 "세계 최고의 신문"이라고 극찬했던 것, 그리고 절친한 데이빗 포그와 많은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을 봐도 그런 기운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대형 출판사인 McGraw Hill, Oberlin Press와는 이미 아이튠즈를 통한 교과서의 판매를 위해 공동작업이 시작되었다는 후문입니다.  이는 특히 한권에 수백 달러씩 하는 대학교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아마존의 킨들이 주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애플 태블릿은 교과서의 판매 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내용을 다양한 형태로 가공하거나 자신의 공부에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해서 훨씬 다양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것이 확실합니다.

최근 애플의 본사에서 최대의 잡지사들의 임원들과 애플의 회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잡지들을 어떻게 애플 태블릿에 발행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논의되었다고 하는데, 이미 상당수의 잡지들이 이미 상호작용이 가능한 잡지의 새로운 포맷을 가지고 와서 프리젠테이션과 브레인 스토밍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단순히 애플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업계가 미래를 위해서 같이 움직이는 형국입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책을 읽는 경험을 전자출판의 형태로 전달하는 아마존 킨들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터치 기반의 전자책은 기본!

애플의 태블릿은 키보드나 마우스 없이, 터치를 바탕으로 쉽게 넘기고 볼 수 있는 형태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의 쿠리어(Courier)가 보여준 노트와 스크랩 기능 등 단순한 전자책 이상의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애플과 가장 전통적인 책들의 출판사들과 회동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진행상황만 보더라도 조만간 출판사들과도 미팅을 가지고 같이 협업을 진행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재까지의 애플의 행보와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 내용을 돌아보면 애플은 태블릿에 단순한 전자책 리더 소프트웨어를 올리는 정도로 일을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이미 수많은 미디어들과 함께 차세대를 만들 수 있는 하이브리드 형의 컨텐츠를 만들고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컨텐츠들은 기존의 E-Ink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로 보입니다.  사용자들의 상호작용과 멀티미디어가 같이 결합된 컨텐츠들, 그리고 아이튠즈를 통한 판매 및 경험의 전수 ...  이런 복합적인 시나리오가 모두 적용된 애플 태블릿이 내년 상반기에 나온다면, 또다른 문화혁명을 우리들이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는 아마존의 킨들보다는 지난 번 소개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쿠리어(Courier)가 이들의 경쟁상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애플이 가져올 또 하나의 바람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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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Book, 전자책에 대한 접근 방식이 잘못되어 보인다.

    Tracked from 시답잖은 지식과 개똥철학  삭제

    이 글은 카테고리를 '조금 긴 댓글'로 보내야 하겠지만 댓글을 쓰다보니 좀 길어졌고, 원래 비슷한 내용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댓글을 그대로 가져와서 내용을 보강한다. 내용은 전자책, 그 가운데에도 디지털 교과서에 좀 더 집중하여 고민한 결과이다. 발단은 Enits님의 댓글로부터 시작되었다. Enits님: 제게는 디지털 교과서에 관한 글을 두고 한컴 그룹웨어에서 유입이 좀 있었죠. 시비의 요소는 없긴 했지만 신경은 좀 쓰이더군..

    2009/10/01 17:23
  2. Skywalker의 알림

    Tracked from mktarcadia's me2DAY  삭제

    아마존 킨들에 사형선고 내린 스티브 잡스 디바이스의 우위로는 캐즘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잡스. 아마도 절대 압도적인 컨텐츠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런칭하지 않을 것 같다. 컨텐츠에 대한 사고 없이 디바이스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국내 전자북…

    2009/10/04 19:04
  3. 한국형 OLPC 디지털 교과서를 주장한다. (IT사회공헌)

    Tracked from 숲속얘기의 조용한 카페  삭제

    1. 사라진 OLPC 2006년 이후로 OLPC에 대한 이야기가 뚝 그쳤고, 간간히 검색해보면 몇가지 리눅스 소프트웨어만 눈에 띌 뿐이다. 2009년 하반기에넷북에 있을 3D도입, 더 작아지고 싼값과 네트워크 OS등의 다이나믹한 변화에 비하면, 넷북의 근원이 되었던 OLPC운동은 초라하기

    2009/10/07 14:20
Picture from Wikipedia

오늘날의 애플의 대성공은 길게 보면, 초창기 PC 시장을 주도하면서 전세계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애플 II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 PC라는 것의 대성공을 이끈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입니다.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이 공동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는 컴퓨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 입니다.  이 소프트웨어 하나로 애플 II는 단순한 가정용 컴퓨터 기기를 너머서 기업에서도 꼭 필요한 컴퓨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의 실수를 보고 시작된 아이디어

1978년 하버드 MBA 과정에 있던 댄 브리클린은 전통적인 종이 스프레드 쉬트를 이용하여 교수가 강의를 할 때, 교수가 하나의 셀에서 실수를 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를 고치기 위해서 모든 셀의 값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훨씬 생산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력이 있어야 하는 법 ...  브리클린은 베테랑 프로그래머인 밥 프랭스턴을 고용합니다.  당시 컴퓨터가 없었던 주변에서 PC를 수소문하는데,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 였습니다.  애플 II에는 당시 정수베이직(Integer Basic)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밥 프랭스턴은 이 언어를 이용해서 데모 프로그램을 구현합니다.

브리클린에게 애플 II를 빌려준 사람은 Personal Software사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 였습니다.  그 역시 애플 II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컴퓨터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게 자사의 체스 프로그램을 애플 II 용으로 포팅하겠다고 하고 매우 싸게 애플 II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애플 II용으로 개발된 것에는 이렇게 대단한 행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댄 필스트라는 브리클린과 밥 프랭스턴이 구현한 데모를 보고 즉시 제품개발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비지캘크를 발표한 Software Arts 입니다.


소프트웨어 역사의 한획을 긋다.

비지캘크는 소프트웨어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기록한 제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자 최초의 스프레드 쉬트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비지캘크가 정형화한 스프레드 쉬트의 형태는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애플 II는 하드웨어 사양에 있어, 폭으로 글자를 40자(40 컬럼)만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좌우폭의 한계 때문에, 비지캘크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애플에서는 이를 80컬럼으로 늘리는 주변장치 카드를 판매하였는데 이 카드의 판매량도 비지캘크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지캘크는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100 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립니다.  소프트웨어의 판매가 급성장하자, 애플 II도 번들 전략을 이용해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십 만대의 애플 II 컴퓨터들이 단지 비지캘크를 사용하기 위해서 팔리게 됩니다. 


최초의 성공자,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하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댄 브리클린은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에게서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지캘크의 성공신화는  IBM PC의 등장과 함께 로터스의 1-2-3가 나오면서 저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동업자였던 Personal Software에서 1983년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로터스에게 비지캘크를 판매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비지캘크라는 소프트웨어는 그 생명을 다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 특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Software Arts는 로터스에 매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비지캘크는 사무혁명을 일으킨 소프트웨어이자, 기업의 OA(Office Automation)를 일으키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일종의 기계로 바라보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도 비지캘크의 공입니다.  애플 II는 당시 난립하고 있던 가정용 PC 시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애플도 대단히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댄 브리클린이 비지캘크를 개발할 때, 애플 II 컴퓨터가 아닌 TRS-80이나 코머도어같은 당시 애플 II와 경쟁하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PC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까요 ...

그럼에도 현재 이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판도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현재 잘 나가고 있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혁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긴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법입니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 VisiCalc
The First Spreadsheet - VisiCalc - Dan Bricklin and Bob Frankston By Mary B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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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C혁명을 일으킨 숨은 영웅, 댄 브리클린

    Tracked from 자그니의 시크릿 스크립팅 뉴스  삭제

    <FONT color=#3366ff>오늘날의 애플의 대성공은 길게 보면, 초창기 PC 시장을 주도하면서 전세계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애플 II의 역할이 지대합니다.&nbsp;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 PC라는 것의 대성공을 이끈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SPAN style="FONT-WEIGHT: bold; COLOR: rg..

    2009/06/15 19:03

올해 초에 있었던 라스베가스 CES 미팅 최대의 화제작인 팜프리의 발표와 뒤를 이은 아이폰과의 특허분쟁으로 애플과 팜의 자존심 및 감정싸움이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는데요 ...  여기에는 애플 아이팟 프로젝트 부분의 총책임자였고 애플의 모든 하드웨어 관련 기술을 책임졌으며, 현재는 팜(Palm)의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에 대한 애플의 불편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은 아이팟을 대성공 시키고 아이폰이 탄생할 수 있었던 토양을 마련한 장본인이지만, 지금은 최대의 경쟁사에서 애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존 루빈스타인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합니다.

관련글: 2009/01/23 - 점입가경의 아이폰과 팜프리의 전쟁, 특허분쟁으로 번지나?
         2009/01/22 - 미국 현지에서 팜프리의 돌풍이 심상치 않습니다.


베테랑 애플 하드웨어 책임자가 아이팟을 책임지다.

2001년 1월 애플은 1억 9,500만 달러의 손실을 발표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뒤 기록한 기록적인 손실이었습니다.  아이맥의 성공으로 애플이 다시 PC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전체적인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스티브 잡스가 선택한 것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MP3 기기 산업으로 진출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산업은 애플보다 되려 우리나라의 아이리버나 미국에서도 작은 벤처기업들이 먼저 시작한 분야입니다.  애플은 MP3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사운드잼 MP라는 음악재생기의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이 기기의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던 제프 로빈(Jeff Robin)이라는 엔지니어를 영입합니다.  제프 로빈의 활약으로 음악과 관련한 애플의 플랫폼이 되는 아이튠즈(iTunes)를 2001년 1월 맥월드 엑스포에서 발표하고 뒤를 이어 하드웨어 개발에 착수합니다.  

이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 바로 10년 이상 애플의 하드웨어 사업을 이끌었던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새로운 음악재생기 사업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존 루빈스타인은 잡스가 애플을 떠나 설립했던 넥스트(NeXT)에서 하드웨어를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를 하면서 존 루빈스타인도 자연스럽게 애플에 합류를 하면서 애플 하드웨어 개발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004년이 되면서 애플은 아이팟 부문과 매킨토시 부문을 분리하게 되는데, 존 루빈스타인은 아이팟 부분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애플 하드웨어 개발 프로세스를 장악한 카리스마

1997년 애플에 합류하자 마자 루빈스타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품 라인과 하드웨어 개발 프로세스를 장악하는 것 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애플은 15가지가 넘는 제품들을 각각의 독립적인 개발 프로세스와 생산라인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개발팀은 제대로 소통을 하지 않았고, 각각의 부품들은 공통적인 요소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중구난방이었던 개발 프로세스와 제품생산과 관련한 프로세스를 완전히 정리합니다.  제품의 연구개발과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을 거의 절반 가까이 절감합니다. 

1998년에는 애플의 최대 히트작 중의 하나인 아이맥이 선을 보입니다.  루빈스타인은 아이맥 하드웨어 부분을 총괄하면서 11개월 만에 출시할 수 있는 제품개발 완료를 하는 괴력을 보입니다.  이는 과거의 애플 개발진으로서는 엄두도 못낼 엄청난 속도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몇 개의 옵션이나 주변기기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USB를 중심으로한 주변기기 표준의 변경, 플로피 디스크를 없애는 등의 굵직한 혁신을 만들어낸 제품인 아이맥은 조너던 아이브와 존 루빈스타인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팟 성공의 열쇠가 된 초소형 HDD와 스크롤 휠

아이팟의 하드웨어를 고민하던 존 루빈스타인이 "빙고"를 외치게 된 사건은 일본에서 벌어집니다.  2001년 2월 도쿄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에 참가하던 그는 매킨토시 HDD를 공급하는 업체인 도시바(Toshiba)를 방문했다가 1.8인치 HDD를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노트북에 집어넣은 HDD도 2.5인치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에, 도시바 조차도 이렇게 작은 HDD를 어디에 쓸지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존 루빈스타인은 이를 보는 순간 바로 새로운 아이팟에 대한 감을 잡았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스티브 잡스에게 보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팟의 하드웨어 디자인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드웨어 디자인을 위해 필립스와 제너럴 매직의 휴대용 기기 제작으로 유명한 엔지니어인 토니 파델(Tony Fadell)을 고용하고, 아이팟 팀을 구성했는데 이 팀은 철저히 비밀리에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초소형 HDD가 기본을 제공했다면, 아이팟을 다른 제품과 차별화시킨 스크롤 휠은 의외로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제안한 것입니다.  사실 단순해 보이지만 참신한 인상을 준 이 스크롤 휠 아이디어는 아이팟 성공의 가장 큰 효자가 되었습니다. 

루빈스타인은 단순히 아이팟을 단일기기로 성공시키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곧 이어 아이팟에 의한 2차시장과 그 생태계의 중요성을 파악한 루빈스타인은 스피커, 충전기, 각종 도킹 포트, 그리고 백업 배터리 등과 같은 수많은 액세서리 마켓을 집중 공략합니다.  이를 통해 구성된 아이팟 생태계는 매년 $10억 달러이상의 매출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아이팟 제외하고).


영원한 2인자로 있을 것인가? 

이렇게 승승장구했던 존 루빈스타인이 어째서 애플을 떠났을까요?  넥스트에서부터 스티브 잡스와 함께 했고, 그를 따라 애플을 최고의 기업으로 성공시킨 사나이가 애플을 떠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아이폰(iPhone)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폰의 개발과정에도 깊이 관여하던 존 루빈스타인은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 제품의 개념 정립에서부터 세세한 제품개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스티브 잡스의 간섭을 참지 못했습니다.  존 루빈스타인은 아이폰을 자신의 개념에 맞추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스마트 폰의 형태로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일부 비전이 스티브 잡스와 달랐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아이폰 개발을 하면서 루빈스타인이 더 이상 잡스의 그늘에서 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애플이라는 선망의 대상 기업에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상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스타일로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팜(Palm)의 중흥을 책임지다.

존 루빈스타인은 아이팟의 대성공을 뒤로 하고 2007년 향후 애플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팜(Palm)의 회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총 동원하여 2008년 월스트리트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인 엘리베이션 파트너에서 $3억 2500만 달러의 투자를 결정하게 만듭니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엘리베이션 파트너는 팜 프리의 성공을 확신하고 최근 추가로 $1억 달러의 투자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애플에서 특허와 관련한 커다란 송사를 치루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철저히 대비를 해 놓은 상태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미 팜에서는 특허분쟁을 통해 애플에게 지불해야할 라이센스 비용을 계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CES에서 내놓은 팜프리(Palm Pre)는 그의 이러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역작입니다.  팜이 자랑으로 여기던 운영체제도 리눅스 기반으로 완전히 뜯어고치고, 아이폰 이상의 인터페이스를 선보인 팜프리는 아마도 올해 스마트 폰 전쟁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다크호스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벤처캐피탈에게서 최고의 성공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아직까지 소비자들로부터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니기에 그의 성공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그가 애플에서 이룩했던 수 많은 전과를 고려할 때 과거 팜이 누렸던 영화를 되찾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많은 이들의 우상인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경쟁자가 되어 버렸기에 만인의 공적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루빈스타인이 꼭 성공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과 같은 난세에는 새로운 성공신화를 이룩하는 영웅이 하나라도 더 나와야 하니까요 ...

마지막으로 CES에 공개되었던 팜 프리의 데모 동영상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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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로고스피어 IT 리포트 111호 - 200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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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고스피어 IT 리포트 111호 - 20090414IT 관련 블로그 동향을 정리하는 주간 블로고스피어 IT 리포트는 매주 금요일 오후 http://goodgle.kr 에서 발행됩니다. RSS 피드 http://goodgle.kr/rss 를 통해 매주 발행되는 주간 블로고스피어 IT 리포트를 간편하게 구독하세요.주요 블로깅UCC 포털의 위기! 몇가지 해법 :엠엔캐스트, 태그스토리, 판도라 등 국내 주요 동영상 포털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심각한 경영상...

    2009/04/14 15:15
  2. 왕의 귀환, 팜 프리(Palm Pre)

    Tracked from 마루날의 雜學辭典|잡학사전  삭제

    내가 일정이나 연락처 관리를 시작한 것은 CASIO 전자수첩을 사용하던 1995년부터이다. 당시 나는 삐삐와 전자수첩은 외출할 때 당연히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셀빅이라는 PDA를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PDA에 입문하였다. 셀빅을 쓰다가 잠깐 Palm V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서 느끼는 것은 PDA란 이런 것이다의 모범 답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Palm의 안정성과 뛰어난 기능은 정말 대단했었는데, 윈도우즈 CE가 탑재된 COMPAQ의 i..

    2009/04/16 14:07
클래식 애플 로고를 현대적으로 ...  (Picture by Alistair Israel from Flickr)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 피카소가 한 유명한 말 중에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도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피카소 만큼이나 많이 인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기술을 직접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위대한 기술을 한 눈에 알아차리고 이를 가지고 와서 성공을 시키는 것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었던 기술을 무수히 만들어 낸 제록스 PARC 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만, 결국 아무리 우수한 기술도 이를 발굴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 연구실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애플이라는 기업은 그들의 회사 이름처럼 씨앗이 되는 기술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해준 나무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연관글:  2009/03/24 - 최고의 연구소였지만, 사업은 실패한 제록스 파크

스티브 잡스가 팔로알토의 제록스 연구소에서 Alto를 본 순간, 그는 조만간 모든 컴퓨터가 GUI를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고, 애플로 돌아와서는 바로 이를 상용화하는데 매진하게 됩니다.  같은 기술을 본 제록스의 경영진들은 수십 차례나 데모를 했음에도 그 기술이 가진 혁신성과 잠재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GUI 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단순한 컴퓨터와의 인터페이스 수준을 넘어 다양한 디지털 가전기기 및 모바일 인터페이스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인터페이스 혁신을 이루어낸 USB 기술 역시 애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전세계에 퍼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USB를 처음 고안한 회사는 바로 인텔(Intel)입니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채택이 되지 못하고 있었지요.  USB는 처음 나왔을 당시 속도가 빠르지 못해서(오늘날 2.0은 이런 부분의 문제점을 상당히 해결했지만), 의외로 PC 업체들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속도 보다는 USB가 플러그-앤-플레이 방식에 최적화 되어있고, 따로 전선이나 파워가 없어도 주변기기를 동작시킬 수 있다는 사용자 편의성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사의 매킨토시 라인에 전면도입을 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USB의 사용자 편의성이 애플 매킨토시의 컨셉과 워낙 잘 맞았기 때문이지요 ...  결국 아이맥의 대히트와 함께 USB의 장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그 이후 PC 업계를 포함한 무수한 디지털 기기의 인터페이스 부동의 표준으로 그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무선 인터넷의 표준인 WiFi의 성공에도 애플의 역할이 컸습니다.  WiFi는 현재는 프랑스 알카텔(Alcatel)에 합병된 루슨트(Lucent) 테크놀로지와 아기어(Agere)사가 개발한 기술입니다.  오늘날의 대단한 성공에서 바라보면 기술개발 후 바로 엄청나게 각광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기술개발이 완료된 1991년 이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상용화를 하는 모험을 시도한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기술이 뒤늦게 대부분의 노트북 시장을 장악하면서 기술의 꽃을 피우게 되는데, 여기에는 1999년 애플이 WiFi를 자사의 모든 컴퓨터 라인과 디지털 허브의 개념으로 에어포트(AirPort) 무선인터넷 환경에 대한 전략을 발표하고, 동시에 무선 노트북의 시대를 맥북과 함께 열면서 전세계에 퍼지게 됩니다.  이후 맥북의 편리한 무선 인터넷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전세계의 PC 메이커 들이 노트북에 WiFi를 기본 탑재하게 되었고, 기술적인 문제점들도 하나 둘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아이팟이 보여준 디지털 음악 혁명이나 아이폰의 멀티터치가 일으키고 있는 센세이션 역시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기술을 처음 개발하고, 특허를 내고, 연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상용화를 할 수 있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애플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는 회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에서 이야기하는 의제설정(agenda setting)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런 능력을 기르는 것이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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