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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시애틀로 옮긴 이후에 여러 8비트 컴퓨터 회사들의 BASIC 인터프리터를 구현하면서 점차 몸집이 커져갑니다.  그렇지만 엔지니어 위주의 회사가 몸집이 커지다보니 회사의 회계와 기본적인 관리를 포함한 경영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개발자 임금협상과 관련한 문제로 미국 노동중재위원회에 빌 게이츠가 불려가는 일까지 있으면서 전문경영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 때 빌 게이츠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현재의 마이크로소프트 CEO로 있는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입니다.  스티브 발머는 빌 게이츠보다 한살 어린 1956년 생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스티브 발머는 공부도 잘했지만, 하버드 대학의 미식축구 팀도 관리하고, 하버드 대학 학교신문인 하버드 크림슨(Harvard Crimson)에서도 일을 하는 등 매우 활발한 학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빌 게이츠와는 기숙사에서 가까운 위치에 방을 얻어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하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스티브 발머는 2년간 세계적인 소매업체인 프록터앤갬블(Procter and Gamble, P&G)에서 일을 했는데, 그 당시 같은 사무실을 쓰던 제프리 이멜트(Jeffrey R. Immelt)는 훗날 GE(General Electric)의 CEO가 됩니다.  작은 사무실의 신입 동료들이 훗날 세계 최대의 회사의 CEO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P&G에서 나와 스탠포드 대학에서 MBA 과정을 이수하던 스티브 발머는 빌 게이츠의 낙점을 받고 결국 스탠포드  MBA를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작은 회사에 자신의 미래를 거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를 합류시키기 위해 빌 게이츠는 정말 대단한 정성을 들였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빌 게이츠는 스티브 발머를 시애틀 친가에 초대를 해서 부모님들과 소개도 하고, 그를 위한 성대한 만찬을 열었습니다.  또한, 시애틀 관광도 같이하면서 하루종일 설득을 하였는데 빌 게이츠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에 홀딱 빠져들게 됩니다.  1980년 6월 11일,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24번째 직원이 되면서 개발자 위주의 조직인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영관리를 전담합니다.  스티브 발머는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데 주식소유를 중시하였습니다.  자신도 입사를 하면서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의 8%를 소유하였고, 이후 스톡옵션을 고안해서 많은 직원들에게 회사에 헌신하고 동시에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어주는데 그 결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식공개를 하면서 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백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BASIC 전도사, 엄청난 기회를 잡다.

빌 게이츠가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는 Altair 8800 에서의 BASIC 언어 인터프리터를 구현한 것을 시작으로, 애플 II 의 애플소프트(Apple + Microsoft) BASIC 을 포함하여 당시 수많은 8비트 컴퓨터의 BASIC 을 구현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BASIC 언어는 익히기도 쉬워서 1970년대 후반 미국 정부에서는 컴퓨터 교육과정을 BASIC 을 중심으로 짜게 됩니다.  국내에서도 처음 8비트 컴퓨터 붐이 일었던 1980년대 초반 대부분의 컴퓨터 교육이 BASIC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거의 모든 컴퓨터에 우수한 BASIC 언어를 탑재해야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되고,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분야에서 최고의 회사로 인정받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비즈니스 환경은 결코 소프트웨어 회사들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돈은 하드웨어를 판매하는 컴퓨터 회사들이 많이 벌었고, 그렇게 많은 컴퓨터에 BASIC 언어를 구현했지만 1981년 MS-DOS 를 탄생시키기 전까지 마이크로소프트가 벌어들인 돈은 모두 합해서 5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애플 II 가 가장 대표적인 컴퓨터로 이름을 날리고, 다양한 클론 제품군들이 나오면서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당시의 컴퓨터 환경은 글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습니다.  이 시기에 IBM이 1년간의 TFT를 통해 당시 호환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방형 아키텍처와 호환기종이 쉽게 생겨날 수 있도록 한 정책, 그리고 범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 컨셉을 들고 나오면서 판세는 급격히 IBM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IBM이 PC 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많은 조언을 얻은 사람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있었습니다.  특히 CPU를 선정할 때에 인텔 8088 또는 8086 16비트 프로세서를 추천한 것도 빌 게이츠 였는데, 당시 가장 많이 이용되던 모토롤라 등의 CPU를 생각하던 IBM의 직원들을 논리정연한 설명으로 인텔 CPU를 채택해야하는 당위성을 설득시키면서 IBM의 PC 제작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드웨어의 구색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IBM은 운영체제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때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빌 게이츠입니다.  빌 게이츠는 CP/M을 만든 게리 킬달이라면 새로운 인텔의 16비트 CPU에 최적화된 운영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게리 킬달의 디지털 리서치를 소개합니다.  당시 게리 킬달의 CP/M 은 당대 최고의 운영체제로 애플 II 를 제외한 컴퓨터에서 거의 독보적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게리 킬달은 특히 비행기 광이어서 개인용 비행기를 사서 미국 전역을 날아다니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성격이 결국 거대한 기회를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주게 됩니다.  IBM과의 미팅약속을 해놓고도 게리 킬달은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고, IBM을 맞은 사람은 그의 아내인 도로시였습니다.  이 때부터 IBM의 감정은 상할데로 상한 상태였지만, CP/M이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IBM은 디지털 리서치와 의견조율을 통해 CP/M을 IBM-PC에 맞게 개발하도록 대략적인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계약은 엉뚱한데서 깨지게 됩니다.  IBM은 자신들의 PC 프로젝트의 기밀유지가 중요했기에 해당 프로젝트와 관련한 비밀준수게약을 디지털 리서치에 요구하는데, 디지털 리서치는 이런 요구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고 계약 전체를 거부합니다.

IBM은 이 대목에서 디지털 리서치와 더 이상의 줄다리기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 게이츠를 불러서 혹시 운영체제를 개발해줄 수 없냐는 의사타진을 합니다.  당시의 빌 게이츠는 BASIC 인터프리터는 많이 개발했지만 정작 운영체제를 개발한 경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대단한 모험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바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한 빌 게이츠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Seattle Computer Product, SCP)라는 회사가 CP/M을 기반으로 만든 86-DOS 라는 운영체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대담하게 이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 빌 게이츠에게 넘어가다.

86-DOS는 인텔의 8086 16비트 CPU에 동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CP/M 기반의 운영체제입니다.  SCP는 자신들의 컴퓨터를 디자인하면서 디지털 리서치의 CP/M을 인텔 8086에 맞게 개발된 것이 있다면 채용을 하려고 했지만, 디지털 리서치는 계획만 발표하고 실제로 동작하는 운영체제의 출시를 차일피일 늦추고 있었습니다.  이에 SCP는 24세의 젊은 컴퓨터 천재인 팀 패터슨(Tim Paterson)을 고용하여 16비트 CP/M 운영체제를 개발하라고 합니다.

팀 패터슨은 오래된 CP/M 프로그램과 호환이 되는 API를 가지고 86-DOS를 디자인합니다.  동시에 CP/M을 쓰면서 불편했던 점들 개선하는 방향으로 운영체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CP/M의 파일 시스템 대신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텔 8086 CPU 용으로 개발한 BASIC-86이 가지고 있었던 FAT 파일 시스템을 채용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BASIC과의 호환성을 극대화 하였습니다.

IBM으로부터 일단 전권을 위임받은 빌 게이츠는 SCP와 협상을 통해 1980년 12월 $25,000 달러라는 헐값에 86-DOS에 대한 라이센스를 획득합니다.  1981년 5월 마이크로소프트는 팀 패터슨을 스카웃해서 IBM-PC가 채택한 8088 CPU에서 동작하는 운영체제를 개발하도록 하였습니다.  1981년 7월, IBM-PC가 출시되기 한달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SCP로부터 86-DOS와 관련한 모든 권리를 $50,000 달러에 사들입니다.  이 때의 계약은 후일 SCP와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디지털 리서치 사이의 법정분쟁에서도 문제가 되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SCP 측과 계약을 할 당시 IBM과 진행하던 프로젝트 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IBM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운영체제로 사용될 것을 상상하지 못했던 SCP의 사장은 너무나 싼 가격에 모든 권리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법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의 계약관계를 SCP 측에 알릴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을 숨기고 시장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계약을 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불만은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이 사건은 결국 마이크로소프트가 SCP 측에 100만 달러를 더 주는 수준에서 중재가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86-DOS를 IBM에게 라이센스를 주는 계약을 맺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PC-DOS 1.0 입니다.  여기에 더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사용권과 일시불 계약을 원하던 IBM을 출시시간의 압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독점도 주지 않고, 로열티 계약을 하는 대단한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의 개방형 정책의 수혜를 직접적으로 입게 됩니다.  이후 수많은 IBM-PC 호환기종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의 회사 이니셜을 딴 MS-DOS를 판매합니다.  MS-DOS는 PC-DOS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운영체제로 오리지널 IBM-PC를 제외한 호환 컴퓨터에서 판매된 운영체제입니다.


디지털 리서치, 뒤늦은 후회와 잘못된 전략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어이없게 마이크로소프트에게 IBM의 운영체제 자리를 빼앗겨버린 디지털 리서치의 게리 킬달은 PC-DOS를 살펴 보다가 PC-DOS가 자신이 개발한 CP/M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복제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IBM을 지적재산권 침해로 고소하려고 하였으나, 디지털 리서치의 변호사는 IBM과의 송사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IBM과 어떤 형태로든 중재를 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권합니다.  이에 게리 킬달은 IBM과의 담판을 통해 자사의 CP/M-86 과 마이크로소프트의 PC-DOS 를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합의합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게리 킬달은 CP/M-86 이 안정성과 기능성 모두에서 PC-DOS 를 압도한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면서 가격정책을 결정합니다.

디지털 리서치가 IBM-PC를 구매할 때 옵션으로 CP/M-86 을 선택할 때 제시한 가격은 $240 달러였고, PC-DOS는 $60 달러에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적으로 CP/M-86 이 훨씬 나았고 게리 킬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되는 운영체제라고 생각했겠지만, 소비자들은 저가의 PC-DOS를 대부분 선택합니다.  이와 함께 IBM 호환기종을 내놓은 업체들 역시 오리지널 IBM-PC 와의 완벽한 호환성을 위해서 대부분 MS-DOS 를 채택하면서 결코 저물지 않을 것 같았던 디지털 리서치의 CP/M 신화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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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지난 포스트에 이어 오늘도 변방국가 최고의 장수 한명을 소개합니다.  바로 8비트 최강의 운영체제인 CP/M을 만들었던 게리 킬달(Gary Kildall)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이면서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 Inc.)라는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를 있게 만든 MS-DOS 역시 CP/M의 아류작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였습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게리 킬달과 바늘 틈과도 같은 기회를 포착하고 여우처럼 낙아챈 마이크로소프트의 운명은 IBM의 기분에 따라서 결정되고 맙니다.  게리 킬달은 죽을 때까지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하는 오늘의 삼국지 이야기 시작합니다.


시애틀의 컴퓨터 천재, 세계 최초의 PC용 운영체제를 개발하다.

게리 킬달은 여러모로 빌 게이츠와 비교가 됩니다.  그 역시 시애틀 토박이로 대학 역시 시애틀의 명문인 워싱턴주립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을 나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실리콘 밸리 인근 해안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한 몬터레이의 미국 해군 대학원에서 미해군을 가르치면서 군복무를 대신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인텔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입니다.  그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구입하여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눈여겨 본 인텔은 일과가 마친 이후에 그가 컨설턴트로 일을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게리 킬달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UW로 돌아와 1972년 컴퓨터 과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컴파일러의 최적화와 관련된 데이터 플로우 분석방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의 방식은 아직도 현대의 컴파일러에서 이용될 정도로 영향력있는 논문입니다.  인텔과 계속 일을 하면서, 그는 플로피 디스크가 세상을 바꿀 것으로 예측하고 8008과 8080 프로세서를 이용하여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할 수 있는 최초의 고수준 프로그래밍 언어를 1973년에 개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PL/M 입니다.  같은 해 인텔의 8080 프로세서를 이용해서 플로피 드라이브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범용 디스크 운영체제를 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8비트 운영체제를 천하통일한 CP/M 입니다.  애플 II가 1977년 발표되었고, 스티브 워즈니액이 개발한 애플 II의 DOS(Disk-Operating System)인 Disk-II 와 애플 도스가 그보다 약간 뒤에 개발되었음에도 CP/M의 정교함과 편리함을 따를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천재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보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인텔, CP/M의 대성공

게리 킬달은 CP/M을 개발한 뒤, 자신을 컨설턴트로 써준 인텔에 제일 먼저 데모도 하고 중요성도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인텔에서는 CP/M이라는 운영체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개발한 PL/M 프로그래밍 언어와 컴파일러의 판매권만을 사서 시장에 내놓는 우를 범합니다.

인텔이 CP/M을 냉대하자, 게리 킬달은 그의 와이프인 도로시와 함께 Intergalactic Digital Research 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이후 Digital Research, Inc.로 이름을 바꾸고 CP/M 운영체제를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취미잡지에 광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제일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세계 최초의 PC로 간주되기도 하는 Altair 8800을 복제한 IMSAI 8080 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수 많은 회사들이 서로 다른 컴퓨터에 CP/M을 포팅해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킨달이 정립한 개념이 바로 BIOS(Basic Input/Output System) 입니다.  컴퓨터 하드웨어에 내장된 BIOS만 수정하면 CP/M은 어느 컴퓨터에서나 동작을 하였고, 이러한 강점을 등에 업고 CP/M은 8비트 운영체제로서 거의 독점적 위치를 얻게 됩니다.

CP/M은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디지털 리서치는 무려 3,000개가 넘는 컴퓨터 모델에서 CP/M을 동작시켰고, 매년 수백 만불이 넘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디지털 리서치가 유일하게 정복을 하지 못한 컴퓨터 모델이 있었으니, 그것아 바로 애플입니다.  애플은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애플만의 독자적인 디스크 운영체제를 고수했고, CP/M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Z-80이나 8080과 같은 CPU가 장착된 카드를 사서 확장슬롯에 꽂아야 했습니다.  


IBM PC의 등장과 CP/M, 그리고 MS-DOS 

1980년 컴퓨터 업계의 거인 IBM이 PC 사업을 시작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플로피 디스크가 기본으로 내장된 IBM-PC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 중의 하나가 운영체제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운영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던 빌 게이츠는 IBM 측에 디지털 리서치의 CP/M을 라이센싱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합니다.  이에 따라 IBM은 16비트용 CP/M 운영체제인 CP/M-86을 자사의 기본 운영체제로 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디지털 리서치를 방문합니다.

당시 게리 킬달은 자신의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소프트웨어를 다른 파트너 회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떠나면서, 계약은 그의 아내 도로시에게 일임을 하고 갔습니다.  이는 게리 킬달이 흔히 하던 방식인데, IBM의 실무진들은 디지털 리서치와의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언제나와 같이 비밀준수계약을 하기를 원했는데 도로시는 게리 킬달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비밀준수계약을 거절합니다.

이에 단단히 화가난 IBM은 디지털 리서치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시애틀로 돌아온 IBM은 빌 게이츠를 만나서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를 개발하거나 대안 운영체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당시 빌 게이츠는 이미 IBM에 BASIC 언어의 인터프리터를 포함한 몇 종류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납품하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고, 시애틀에 위치한 한 작은 회사가 CP/M을 복제한 86-DOS라는 운영체제를 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폴 알렌은 즉시 이 운영체제의 사용권을 단돈 5만 달러에 구매해서 IBM과의 협상에 임합니다.  86-DOS는 IBM의 하드웨어에 성공적으로 포팅이 되고, IBM은 이를 PC-DOS로 명명합니다.

PC-DOS를 본 게리 킬달은 이것이 CP/M을 복제한 것임을 바로 알게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탓에 게리 킬달은 IBM이 협상안으로 제시한 CP/M-86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중재안에 합의를 합니다.  이에 따라 처음 IBM-PC를 출시하면서 IBM은 운영체제를 별도옵션으로 출시합니다.  PC-DOS를 선택하면 $40 달러를 더 내면 되었고, CP/M-86은 $240 달러를더 내야 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DOS라는 이름 대신 MS-DOS라는 이름으로 IBM의 호환기종에게 운영체제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CP/M-86 역시 다른 호환기종 시장에서 경쟁을 했는데, 오리지널 IBM-PC 모델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MS-DOS의 시장지배력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MS-DOS의 성능과 기술은 CP/M보다 떨어졌고, 버그도 많았지만 워낙 싼 가격을 내세운 MS-DOS가 승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디지털 리서치의 경영에서 손을 떼다.

IBM과의 협상을 통해 게리와 도로시는 자신들의 불찰과 잘못된 경영적 판단을 반성하고, 회사의 직접 경영에서 영향력을 점차 줄여나갑니다.  그러면서, 다양하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CP/M을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도록 진화시켰고, BASIC에 대항하기 위해 Logo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현했습니다.  또한, 애플의 Lisa의 데모를 보고난 뒤에는 GEM(Graphical Environment Manager) 데스크탑이라는 GUI도 개발하였습니다.

결국 게리 킬달은 디지털 리서치를 당시 최고의 네트워크 회사였던 노벨(Novell)에 1991년 매각하고, 자신은 PC의 트렌드를 전하는 공중파 방송활동과 광학 디스크 기술을 컴퓨터에 적용하는 KnowledgeSet라는 회사, 최초의 컴퓨터 백과사전이었던 Grolier's American Academic Encyclopedia, 가정용 PBX 시스템을 이용한 유선전화와 휴대폰을 통합하는 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벤처사업을 하였습니다.


게리 킬달은 언제나 창의적이고 호탕했으며, 모험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비행기 조종, 스포츠 레이싱과 보트를 사랑했고 바다를 사랑하였습니다.  IBM과의 사건 이후에 그는 언제나 빌 게이츠와 비교했으며, 빌 게이츠를 싫어 했다고 합니다.  특히 1992년 자신의 모교인 UW의 컴퓨터 과학 프로그램의 기념일에 초청을 받았는데, 하버드 대학 중퇴 출신인 빌 게이츠가 키노트 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디지털 리서치를 노벨에 매각을 하고, 그는 텍사스 오스틴 인근의 West Lake Hills라는 곳에 이주를 해서 그가 사랑한 스포츠 카와 비디오 스튜디오, 그리고 자가용 비행기와 보트를 타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그가 사랑했던 도시인 몬터레이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추락해서 사망합니다.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당시 그는 알콜중독으로 많은 시간 술에 취해 있었고, 사고 역시 음주에 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게리 킬달이 이룩한 컴퓨터 과학에서의 업적은 정말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그 중 중요한 것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습니다.

  • PC 최초의 디스크 운영체제 개발
  •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윈도우 기능을 가진 운영체제 개발 및 소개
  • 메뉴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
  • 최초의 디스크 트랙 버퍼링 스키마, Read-ahead 알고리즘, 파일 디렉토리 캐쉬, RAM 디스크 에뮬레이터의 개발자
  • 1980년대 바이너리 리컴파일러를 처음으로 소개
  •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처음으로 동작하는 컴파일러 및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
  • 오늘날 쌍방향 멀티미디어 기술의 기초가 된 최초의 비디오 디스크에 대한 비선형 플레이가 가능한 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
  • 세계 최초의 소비자용 CD-ROM에 대한 파일 시스템 및 데이터 구조 개발
  • 컴퓨터 하드웨어와 운영체제를 개방형으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 아키텍처를 위한 BIOS 개발

그는 진정한 PC의 혁명가였고, 오늘날의 혁명을 있게 한 최고의 과학자였습니다.  비록 신은 그에게 빌 게이츠와 같은 명성과 부를 주지 않았고, 경영능력도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을 것입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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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장수와 변방국가들도 좀 나와야 겠지요?  오늘은 애플이 혁신을 하던 시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던 코모도어가 주인공입니다.


애플 II 최대의 라이벌 코모도어 (Commodore)

애플 II 가 맹위를 떨치며 PC 시장을 장악해가는 과정에 가장 커다란 라이벌이 된 회사가 바로 코모도어(Commodore) 입니다.  코모도어는 1954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설립된 역사가 오래된 회사로 타자기와 관련된 사업으로 시작을 해서, 1970년대초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전자계산기 사업을 통해 성장을 하였습니다.  

전자계산기 사업을 하면서 코모도어는 1976년 애플 시리즈의 메인 CPU 인 6502 칩을 생산한 것으로도 유명한 MOS Technolgy를 인수합니다.  그리고, 회사도 MOS Technology에 가까운 펜실베니아의 웨스트 체스터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PC 시장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976년 애플-1 이 6502 칩을 이용해서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본 코모도어는 본격적으로 PC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합니다.  CPU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당한 자신감도 있었던 듯하고, 당시 애플이라는 회사는 신생벤처회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코모도어와 애플은 한 차례 만남이 있었습니다.  코모도어의 자회사 CPU를 애플이 사용했기 때문에, 애플 II를 제작할 때에는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 마큘라에게 했듯이 자신의 차고로 코모도어의 경영진들을 데리고 와서 만들고 있는 컴퓨터를 보여주었습니다.  코모도어는 당시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온다고 확신을 하고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애플 II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 마큘라처럼 일정 정도의 투자를 받고 지분을 좀 떼어줄 생각이었는데, 코모도어는 그러지 말고 회사 자체를 넘기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야망이 있는 스티브 잡스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코모도어는 조그만 회사가 인수합병 제안을 거절하자 투자를 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나섭니다.

애플 II가 발매된 1977년, 코모도어도 애플 II의 라이벌이 되는 제품을 내놓습니다.  PET 라는 이름의 컴퓨터가코모도어의 첫번째 개인용 컴퓨터로 애플 II 와는 달리 케이스를 모두 금속으로 만들었고, 같은 6502 CPU를 이용했지만 단색의 푸른 화면만 제공하는 등 가정용으로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먼 제품이었습니다.  PET가 실패하자, 코모도어는 애플 II의 성공이 화려한 컬러를 지원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컬러를 지원하되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런 전략에서 탄생한 컴퓨터가 1981년에 발매된 VIC-20 입니다.  이 컴퓨터는 $299 달러라는 파격적인 소매가격과 공격적인 광고를 같이 실으면서 야심차게 등장합니다.  특히 당시 최고의 히트 시리즈이자 미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는데 최고의 영향력을 가졌던 스타트렉의 주연배우였던 윌리엄 샤트너(William Shatner)가 "왜 비디오 게임기를 구입하시나요? (Why buy just a video game?)" 이라는 카피 문구와 함께 등장하는 TV 광고가 대히트를 하면서, 동시에 애플 II의 고가전략(당시 $1000 달러가 넘었음)과 맞물려 애플 II를 제치고 판매대수로는 가정용 컴퓨터 사상 처음으로 100만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합니다.  VIC-20 은 최종적으로 250만대 정도가 팔린 가정용 컴퓨터 역사에 남는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가 되었고, 코모도어라는 이름을 가정용 컴퓨터의 역사에 뚜렷이 남깁니다.  후속으로 1982년에 발매된 코모도어 64는 사운드와 그래픽 지원이 뛰어난 컴퓨터로 $595 달러의 가격에 발매가 되는데, 이 제품은 무려 2300만대가 팔리는 엄청난 히트 상품이 됩니다.  특히 사운드와 그래픽이 좋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게임 타이틀이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미국에서는 코모도어 64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가전략을 내세워서 판매한 후유증은 컸습니다.  판매는 많이 했지만, 이익율은 형편없었고 공격적인 광고와 마케팅을 하느라 비용지출도 많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애플 II는 고급 컴퓨터이고, 코모도어의 컴퓨터는 싸구려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주면서  IBM-PC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의 히트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코모도어의 수장, 기인 잭 트래미엘 (Jack Tramiel)

코모도어를 이끌던 사람은 폴란드 출신의 잭 트래미엘입니다.  1928년 생으로 유태인이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찌의 침공으로 어려운 환경을 겪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가족들이 모두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이슬처럼 사라지기 전에 살아돌아온 유태인 중의 한명입니다.  1945년 기적적으로 구조가 된 그는 1947년 11월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미국에서 육군에 입대하여 타자기를 비롯한 다양한 기계들을 고치는 방법을 배운 뒤에 제대를 하여 택시 운전사로 일하면서 1954년에 창업한 회사가 바로 코모도어 입니다.  이런 개인사를 가지고 있기에 경영에 있어서 모든 부분에 관여하고, 일본식의 관리경영 및 비용절감을 통한 저가전략을 잘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컴퓨터를 제조한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했을 때, 값싼 노동력과 기술력을 믿고 일본에 공장을 설립할 정도로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런 성격을 잘 대별한 것이 코모도어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 및 판매전략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대수의 컴퓨터를 팔아치웠지만, 수익이 저조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1984년 1월 코모도어에서 쫓겨납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난 트래미엘은 차세대 가정용 컴퓨터를 디자인하고 판매하기 위해  Tramel Technology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게 되는데, 비디오 게임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 가정용 컴퓨터의 꿈을 가지게 만든 여러 계기를 제공했었던 아타리 컴퓨터가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약진으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붕괴되어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매물로 나온 것입니다.  트래미엘은 1984년 아타리에서 아케이드 게임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인수합병하고 회사의 이름도 아타리로 변경합니다.

트매미엘이 인수한 아타리는 공격적으로 다양한 가정용 컴퓨터 라인업을 내놓고 비디오 게임에서 가지고 있었던 게임관련 타이틀 등을 많이 제공하는 니치 마켓에 안착을 하면서 재기에 성공합니다.  1989년까지 비교적 착실한 매출과 순이익을 내던 아타리는 1989년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닌텐도 게임보이에 밀려서 결국에는 1996년 하드디스크 제조업체였던 JTS에 매각됩니다. 

잭 트래미엘은 1980년대 후반 아들인 샘에게 경영권을 넘겼었지만, 1995년 아들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결국 아타리라는 회사를 자신의 손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는 IT 산업의 전설로서 남지는 못했지만 코모도어와 아타리라는 굵직한 회사를 경영하면서, 그것도 당대 최고의 회사들과 맞서서 싸운 용장이라고 할만 합니다.  1955년 동갑나기들에 비해 무려 27살이 많았지만, 그가 시도했던 비디오 게임과 가정용 컴퓨터에 대한 철학은 나름의 매니아 층도 형성하였고, 아직도 코모도어와 아타리는 올드 컴퓨터 매니아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Wikipedia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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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II, 새로운 세상을 열다.

스티브 잡스의 직관과 추진력,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걸출한 엔지니어, 그리고 마이크 마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볼 줄 알았던 젊은 엔젤 투자자와 경영능력, 마지막으로 레지스 매키너라는 당대 최고의 마케터가 같이 뭉친 애플 II 는 세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당대 최고의 컴퓨터 회사였던 IBM의 CEO인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수요는 매년 5대 정도면 충분하다는 논리를 폈고, Altair 8800 이 나오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가능성을 비추면서 젊은 사업가들이 세상이 바꿀 것이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여겼습니다.  또한, IBM과 함께 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DEC의 CEO인 켄 올슨(Ken Olsen) 같은 사람은 가정에 어째서 컴퓨터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면서 PC 사업을 쓸데없는 사업 정도로 여겼습니다.  애플을 비롯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나은 기술인력과 네트워크, 자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결국 애플 II 의 대성공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IBM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DEC는 결국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에는 회사가 매각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애플 컴퓨터 역시 스티브 잡스가 아닌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획의 전권을 쥔 엔지니어 마인드로 접근했다면 비슷한 결과를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아타리 컴퓨터에서 여러 작업을 하면서 컴퓨터가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으며, 게임을 비롯한 여러가지 용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사용하기 편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으며, 마이크 마큘라나 레지스 매키너와 같은 동료들도 그런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컴퓨터 회사들과 차별화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런 사용자 편의적이고 즐거운 인생에 도움을 주는 도구라는 개념은 애플의 역사를 타고 도도히 이어져서 현재의 애플 컴퓨터가 만드는 제품들도 잘 살펴보면 개인의 인생과 생활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철학들이 담겨져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플 II의 성공을 이끈 킬러앱, 비지캘크(VIsiCalc)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또다른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이 공동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는 컴퓨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 입니다.  이 소프트웨어 하나로 애플 II는 단순한 가정용 컴퓨터 기기를 너머서 기업에서도 꼭 필요한 컴퓨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Picture from Wikipedia


1978년 하버드 MBA 과정에 있던 댄 브리클린은 전통적인 종이 스프레드 쉬트를 이용하여 교수가 강의를 할 때, 교수가 하나의 셀에서 실수를 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모든 셀의 값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훨씬 생산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력이 있어야 하는 법 ...  브리클린은 베테랑 프로그래머인 밥 프랭스턴을 고용합니다.  당시 컴퓨터가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컴퓨터를 가진 사람들을 수소문하는데, 이 때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 였습니다.  애플 II에는 당시 정수베이직(Integer Basic)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밥 프랭스턴은 이 언어를 이용해서 데모 프로그램을 구현합니다. 

브리클린에게 애플 II를 빌려준 사람은 Personal Software사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 였습니다.  그 역시 애플 II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컴퓨터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게 자사의 체스 프로그램을 애플 II 용으로 포팅하겠다고 하고 매우 싸게 애플 II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지캘크가 애플 II용으로 개발된 것에는 이렇게 대단한 행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댄 필스트라는 브리클린과 밥 프랭스턴이 구현한 데모를 보고 즉시 제품개발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비지캘크를 발표한 Software Arts 입니다.  

비지캘크는 소프트웨어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기록한 제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자 최초의 스프레드 쉬트입니다.  비지캘크가 정형화한 스프레드 쉬트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애플 II는 하드웨어 사양에 있어, 폭으로 글자를 40자(40 컬럼)만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좌우폭의 한계 때문에, 비지캘크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는데, 애플에서는 이를 80컬럼으로 늘리는 주변장치 카드도 판매하였는데 이 카드의 판매량도 비지캘크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지캘크는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100 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립니다.  소프트웨어의 판매가 급성장하자, 애플 II도 번들 전략을 이용해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십 만대의 애플 II 컴퓨터들이 단지 비지캘크를 사용하기 위해서 팔리게 됩니다.  

비지캘크의 성공은 또다른 업무영 소프트웨어들의 발전을 자극하는데, 그 유명한 애쉬턴테이트사의 업무용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인 디베이스(dBase)와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스타(WordStar) 등이 PC 용으로 개발되어 판매가 되었고, PC가 바야흐로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의 첨병으로 대접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최초의 성공자,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댄 브리클린은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의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지캘크의 성공신화는  IBM PC의 등장과 함께 로터스의 1-2-3가 나오면서 저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동업자였던 Personal Software에서 1983년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결국 Software Arts는 로터스에 매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 특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소프트웨어 부분의 특허는 쉽지가 않습니다). 

비지캘크는 사무혁명을 일으킨 소프트웨어이자, 기업의 OA(Office Automation)라는 것을 처음으로 대중화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일종의 기계로 바라보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도 비지캘크의 공입니다.  애플 II는 비지캘크를 무기로 당시 난립하고 있던 가정용 PC 시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애플도 대단히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댄 브리클린이 비지캘크를 개발할 때, 애플 II 컴퓨터가 아니라 당시 경쟁을 하고 있는 라디오쉑(RadioShack)의 TRS-80이나 코머도어 같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PC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까요 ...

그런데, IBM PC의 등장과 함께 시장을 지배하던 로터스 1-2-3 역시 시장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현재 잘 나가고 있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혁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긴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법입니다.


애플 II의 또 하나의 성공전략, 게임과 교육

애플 II의 성공에 직장에서는 비지캘크가 큰 역할을 했다면, 가정에 보급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게임과 교육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게임회사에 다녔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개발한 정수 BASIC을 게임 BASIC이라고 부를 정도로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해상도 그래픽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당시 경쟁대상이었던 어떤 컴퓨터 보다도 게임을 지원하기 위한 여건이 뛰어났습니다.

특히, 애플 II 는 다른 컴퓨터와는 달리 RF 모듈레이터라는 것이 있어서 컬러 TV에 연결이 가능해서 컬러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 애플 II+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 전용 모니터를 사지않고 TV를 연결해서 이용했었는데, 컬러 TV에 연결해서 즐기던 게임들은 다른 어떤 PC들보다 우수하고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지캘크를 통해 사무실을 장악한 애플 II가 또 하나의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 시장은 교육시장이었습니다.  애플 II는 아이들의 학습도구로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대규모 캠페인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 컴퓨터 한대 정도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특히 캘리포니아주 모든 학겨에 애플 II 컴퓨터를 한 대씩 무료로 기증하는 과감한 행보와 함께, 광고로 애플 II 컴퓨터로 학교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통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컴퓨터 교육과정이 정규과정으로 편성이 되면서,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더욱 익숙했던 애플 II는 자연스럽게 다른 경쟁 컴퓨터들을 제치고 부모들이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주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에 컴퓨터를 한 대씩 장만하는 투자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렇게 애플 II 가 급속도로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당시 큰 인기를 끌던 가정용 게임기가 우수한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를 통해 붕괴되는등 만만치 않은 산업적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컴퓨터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프린터도 판매가 되면서 EPSON 등과 같은 라인 프린터 회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또한 애플 II 의 성공에 자극받아서 많은 수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코모도어 64라는 제품을 앞세웠던 코모도어사는 1700~2500만대 정도의 컴퓨터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결국 IBM 이라는 거인이 PC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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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애플 아이패드가 공식적으로 출시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난 해에 루머가 나왔다가 사라져버린 마이크로소프트의 태블릿인 쿠리어(Courier)의 사진과 동영상이 다시 같은 날 흘러나왔습니다.  실제로 동작한다기 보다는 그림과 컨셉 동영상만 계속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개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굉장히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배포하지도 않는 사진과 영상들이 아이패드 출시에 맞춰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 아이패드가 지나치게 빠르게 태블릿 PC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크롬을 이용한 태블릿을 여러 하드웨어 업체들과 준비하고 있는 구글 역시 쿠리어에 대한 소문과 영상이 나오는 것이 아이패드로 자칫 쏠릴 수 있는 시선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리 나쁠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쿠리어의 컨셉 영상이 처음 소개된 것이 작년 9월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6개월이 지난 것인데, 아직도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 개발이 되고 있다는 가정하에 흘러나오는 몇가지 루머를 정리하면 윈도우 7이 아니라 윈도폰 7과 유사한 Zune 계열의 운영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CPU는 Tegra 2 를 이용하고, 접을 수 있으며 접고나면 5x7 인치 크기의 소형 태블릿이 된다고 합니다.  인터페이스는 기본적으로 펜을 기반으로 하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기능과 스크랩을 하는 것과 같은 노트에서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아이패드와는 다른 형태의 UX 를 제공합니다.  카메라가 들어가 있으며, 전자책을 겸하게 되는데, 올해 연말을 타겟으로 출시할 것이라는 것이 루머의ㅡ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아래 임베딩한 화면은 이번에 새로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동작 컨셉 동영상입니다.







오늘 공개된 그림들과 컨셉 동영상이 실제 개발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아이패드에 대한 김빼기 작전을 펼치는 것이라는 시각도 많습니다.  실제로 쿠리어 영상이 작년 9월에 인터넷에 흘러나온 이후 공식적인 내용은 없었고 이번에도 그냥 새어나온 정보로만 퍼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도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 개념의 프로젝트를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에서 실제로 연구목적으로 진행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트위터 정우석(@laple)님이 소개해주신 마이크로소프트 CODEX 라는 프로젝트의 데모를 보면 하드웨어 스펙이나 동영상 데모의 수준은 아니지만, 컨셉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좋은 기술들이 경쟁적으로 개발된다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빨리 이를 공식화해서 발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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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직 출시도 안된 아이패드를 따라다니는 '아이패드 킬러' 루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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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이 드디어 아이패드의 정식 출시날짜를 발표를 했습니다. 최근, 아이패드의 프로덕션에 차질이 있는 거 같다는 루머가 돌았었는데.. 3월말이라는 스티브잡스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지만 4월3일은 생각보다 빠른 날짜네요. 우선, 미국의 소비자들만 그 날짜에 기다리던 아이패드를 만질 수 있긴 하지만요. 아이패드 공식 발표 이전의 루머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iPhone OS 기반의 iPad 가 아닌 Mac OS 기반의 Mac Tablet 을 예상했다...

    2010/03/0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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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태어난 또 한명의 거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1955년에 태어난 동갑나기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IT 삼국지의 남은 하나의 제국인 구글을 현재 이끌고 있는 CEO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역시 1955년 생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현재 전세계를 움직이는 세 회사의 총수들이 모두 한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어찌보면 역사의 필연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구글의 창업자들은 그보다 훨씬 어리지만 말이죠 ...

에릭 슈미트는 1955년 4월 27일, 버지니아주 폴스처치(Falls Church)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워싱턴 DC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기좋은 도시로 그의 아버지 윌슨 슈미트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국제경제학 교수였고, 닉슨 대통령 시절 미국 재무부에서 일을 했으며, 어머니인 엘리너는 심리학 석사 출신으로 전업주부로 가정에 충실한 전형적인 엘리트 집안입니다.  

에릭 슈미트 역시 중고등학교 다닐 때 대형 컴퓨터를 이용한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천공카드로 구멍을 뚫어서 시간을 나누어 써야 했던 컴퓨터였지만, 그 역시 컴퓨터와의 운명적인 사랑은 외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어렸을 때부터 창업의 길을 걷지는 않았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역시 잘했던 에릭 슈미트는 특히 장거리 육상에 소질이 있어서 최고의 육상선수이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에릭 슈미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프린스턴 대학의 건축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렇지만, 워낙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했던 그는 전기공학과로 전과를 합니다.  특히 대학의 컴퓨터가 밤만 되면 빨라졌기 때문에, 거의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프로그래밍을 하였으며, 여름이 되면 당대 최고의 연구소의 하나였던 벨 연구소에서 일을 했는데, 벨 연구소는 1969년에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운영체제의 하나이자 수많은 다른 운영체제의 원형이 된 Unix 운영체제가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에릭 슈미트는 대학생 신분으로 역사에 남을 프로그램을 하나 완성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컴파일러를 만들 때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도구인 lex 라는 소프트웨어 입니다 (lexical analyzer, 구문해석기).  1979년 프린스턴 대학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한 에릭 슈미트는 같은 해 캘리포니아로 떠납니다.  보다 깊은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버클리를 선택한 그는 여름이면 제록스 파크(Xerox PARC) 연구소에서 다양한 연구를 경험하며 컴퓨터 공학의 이론과 실제를 꾸준히 공부하고 수련하면서 착실히 내실을 다져나갑니다.  그는 1982년 버클리에서 대학졸업 3년만에 초고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그 기간동안 바로 옆동네인 실리콘 밸리에서는 동갑나기 천재인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이 그리고 시애틀에서는 빌 게이츠가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신생회사가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처럼 꾸준하게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커리어를 쌓아나가던 에릭 슈미트는 결국 두명의 천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회사의 CEO 자리에 오르면서 현재 가장 뛰어난 미래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소프트웨어의 한 길을 걸어가는 마이크로소프트

대담하게 세계 최초의 PC 인 Altair 8800 에 공급할 BASIC 언어 인터프리터(이하 BASIC으로 표기)를 개발하겠다며 MITS를 졸랐던 빌 게이츠와 폴 알렌은 가능성을 인정받고 약속한 8주만에 BASIC을 하버드 대학에서 완성을 하고 뉴멕시코 앨버커리로 날아갔습니다.  이들이 개발한 BASIC은 완벽하게 동작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앨버커키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합니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의 도움도 받고, 과거 레이크 사이드 고등학교 시절에 함께 했던 동료들을 속속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시키며 회사를 키워나갑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BASIC은 이용하기도 쉽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에 컴퓨터 매니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또한 당시만 해도 전문 소프트웨어 회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실력을 신뢰한 여러 하드웨어 회사들이 많은 일을 의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업하자마자 1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그 다음해에도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이제는 MITS가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직접 판매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에 딸려나가면서 로열티를 받는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MITS 라는 회사의 하드웨어 생산능력과 판매량에 따라 회사의 성장성이 제한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더구나 독점적 계약을 미끼로 다른 회사의 하드웨어에는 BASIC을 탑재하지 못하도록 했던 MITS 의 정책을 참을 수 없었던 빌 게이츠는 1년 뒤인 1977년 결국 MITS 와의 계약을 파기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약파기에 불복한 MITS는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MITS 측이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맞상대를 합니다.  법원은 빌 게이츠의 손을 들어주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들이 개발한 BASIC 을 다른 회사에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면서 때마침 불어닥친 PC 시대와 함께 회사가 급성장을 하게 됩니다. 

1978년 11월에는 일본의 하드웨어 업체들에게 BASIC 을 공급하기 위해 ASCII Microsoft 라는 법인을 일본에 설립하게 되는데, 이 회사는 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지사가 되며 일본을 중심으로 결성하게 되는 MSX 컴퓨터 연합을 이끄는 중심이 됩니다.  전 세계의 PC 하드웨어 업체들을 고객으로 맞게 된 빌 게이츠는 뉴멕시코를 떠나 자신의 고향인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의 벨뷰(Bellevue)로 회사를 옮기는데, 이 때가 1979년 1월 1일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애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1979년 동부에 있었던 에릭 슈미트는 캘리포니아로 넘어오게 되고, 1977년 애플 II를 발표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1979년 전 세계를 애플 II 로 호령하면서 떵떵거리기 시작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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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빌 게이츠가 폴 알렌과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설립했던 "TRAF-O-DATA" 라는 벤처회사는 당시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 였던 인텔의 8008(후에 8080 을 거쳐, 8088 이 IBM PC에 채택됩니다) CPU를 이용해서 교통상황을 점검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빌 게이츠는 이를 바탕으로 1973년 초에는 미국 하원의회를 위해 일을하기도 합니다.

빌 게이츠는 197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빌 게이츠는 현재의 마이크로소프트의 CEO를 맡고 있는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를 만납니다.  하버드 대학에서도 학업보다는 컴퓨터에만 심취했던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계속 연락을 취했고, 1974년 여름에는 하니웰(Honeywell)에서 같이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고등학교 시절 컴퓨터와 관련한 사업을 하면서도, 하버드 대학에 여유있게 들어갈 정도로 공부도 잘했던 천재였습니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벌레처럼 공부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컴퓨터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학교라는 울타리는 그에게 족쇄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세계 최초의 PC, Altair 8800

세게 최초의 PC로 일컬어지는 Altair 8800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인텔 8008 기반의 Mark-8을 시초로 보기도 합니다)을 탄생시킨 MITS의 창업자인 에드 로버츠(Ed Roberts)와 포레스트 밈스(Forrest M. Mims) 3세는 미국 공군에서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969년 이들은 로켓을 제작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작키트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스탠 케이글(Stan Cagle)과 로버 잴러(Rober Zaller)와 함께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를 창업합니다.  MITS의 로켓 제작키트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키트를 제작하는 사업에 흥미를 잃은 케이글과 밈스는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에드 로버츠 Electronic Array가 전자계산기를 제작할 수 있는 LSI IC들을 발표하자, 이를 이용하여 계산기를 제작하는 키트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를 통해 완성된 제품이 MITS 816 계산기 키트였습니다.  이 키트는 1971년 Popular Electronics의 커버를 장식하며 상당한 성공을 거둡니다.  뒤이어 1973년에는 MITS 1440 계산기가 소개되었고, 점점 발전된 모델을 다른 잡지에도 소개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선 포스트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HP에 입사했던 스티브 워즈니액도 틈틈히 스티브 잡스와 아타리의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맡았던 역할이 바로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공학용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해서 PC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MITS는 주로 전자계산기 조립 키트를 만들던 회사였기에, 당시 판매와 홍보의 역할을 동시에 담당했던 Radio Electronics나 Popular Electronics와 같은 잡지사와의 관계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이 두 잡지사는 오늘날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ZD(Ziff-Davis)의 잡지계열에 있었는데 (현재는 손정의의 소프트뱅크가 소유를 하고 있지요?), 1972년에 Polular Electronics로 통합이 됩니다.  Popular Electronics의 편집장 이었던 Les Solomon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CPU 였던 인텔 8080을 MITS가 잘 다룬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완성된 제품(현대적 PC의 개념)을 개발하기를 권유합니다.  그는 박스까지 완전하게 제작된 프로페셔널한 제품 키트를 원했고, MITS는 이 권유를 받아들여서 Altair 8800의 설계 및 제작에 착수합니다.

1976년 있었던 Altair Computer Convention에서 Les Solomon은 Altair라는 이름을 자신의 12세된 딸이 스타트렉 에피소드를 보면서 제안한 이름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당시 스타트렉 에피소드는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이 Altair라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었는데, 미지의 신세계를 간다는 측면에서의 작명이 된 것이죠 ...  에드 로버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큰 고심을 한 부분이 바로 CPU를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텔의 4004나 8008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고민한 National Semiconductor의 IMP-8이나 IMP-16은 외부 하드웨어를 요구했으며, 모토롤라의 6800은 아직도 개발 중인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다소 위험 부담을 안고 인텔의 새로운 8비트 CPU인 8080을 선택합니다.  인텔 8080은 1974년 4월에 출시가 되었는데, 유닛당 $360 달러라는 가격을 책정했지만, 에드 로버츠는 인텔과 성공적인 협상을 통해 $75 달러에 칩을 공급받고 본격적인 컴퓨터 제작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제작된 Altair 8800의 출시는 빌 게이츠를 포함한 전세계의 젊은이들의 마음에 불을 당깁니다.  수백 대 정도의 판매를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제작된 키트와 완성품들이 동이 났습니다.


Altair 8800의 완성품 from Wikipedia


1975년 8월이 되기 전에 이미 5,000대가 넘는 컴퓨터가 팔렸고, MITS는 직원을 20명에서 90명까지 늘려야 했습니다.  1975년 전반기 까지만 하더라도 시장에는 아무런 경쟁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4K 메모리에 이용된 다이너믹 RAM에는 일부 디자인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공급이 늦어지면서 다른 경쟁자들이 진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빌 게이츠, 폴 알렌 하버드 대학을 뛰쳐 나오다.

이 포스트 제일 위에 보이는 사진은 Popular Electronics 1975년 Vol 7, Number 1의 커버입니다.  원래 Popular Electronics 라는 잡지는 전자제품을 조립하는 취미를 가진 매니아들을 위해 부품도 팔고 조립법을 알려주는 글을 많이 싣습니다.  잡지의 조립키트에는 인텔의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와 256바이트 RAM, 라이트와 스위치, 그리고 철제 케이스와 파워 서플라이를 합쳐서 $397 달러에 판매를 하였고, 조립을 완료한 제품의 경우 $498 달러에 판매가 되었습니다.  

가판대에서 이 잡지의 표지를 본 폴 알렌은 언제나 자신들이 이야기하던 자신만의 컴퓨터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잡지를 사서 바로 빌 게이츠에게 달려갑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대학 캠퍼스를 나와서 사업에 뛰어듭니다.

Altair 8800이 신나게 판매가 되고 있는 도중, 에드 로버츠는 시애틀에 있는 한 회사에서 BASIC 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매할 의사가 없는지를 묻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당시 BASIC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Ed는 회사에 전화도 해보고, 주소에 찾아도 가보지만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 편지는 보스턴에 있었던 빌 게이츠와 폴 알렌에 보낸 것으로 그 때까지 BASIC을 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에드 로버츠가 BASIC과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사업을 통해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의 말보다는 기업체의 공신력이 있는 편지를 더 신뢰하고, 에드 로버츠가 그 편지를 읽어보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썼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을 거쳐 빌 게이츠와 폴 알렌은 에드 로버츠와 접촉을 하게 됩니다.  어린 학생들이 당돌하기는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에드 로버츠는 한번 만들어서 가져와 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에드 로버츠가 일단 관심이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자,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함께 BASIC 인터프리터를 PDP-10 미니컴퓨터의 8080 시뮬레이터를 이용해서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완성된 프로그램을 종이 테이프에 펀칭을 해서 MITS가 있는 뉴멕시코주의 앨버커키까지 날아간 폴 알렌은 Altair 8800에서 실행을 시켰지만, 화면에 일단 "Altair Basic" 이라는 표시만 남기고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첫번째 작업이 실패했지만, 이 사건은 일단 빌 게이츠와 폴 알렌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에드 로버츠에게 주는 것에는 성공을 하였고,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램을 완성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역사적인 기업 "Micro-Soft"가 탄생합니다.  BASIC을 시작으로, 포트란 컴파일러와 디스크 운영체제인 MITS-DOS를 개발한 Microsoft는 결국에는 MITS의 품을 떠나 워싱턴 주로 독립을 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 나갑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가 BASIC을 그토록 사랑하는데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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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영혁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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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T hiconcep님: [하이컨셉&하이터치]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IT 삼국지 (3) http://durl.me/bq6y

    2010/02/20 14:58
  2. 대형유통업체 '10원 전쟁'과 아이패드vs킨들 현상에 대한 미래 트렌드 예측

    Tracked from Trend Insight  삭제

    #1 대형 유통업체 정책에 대한 협력업체의 반발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한 생산자 중심의 Market Power는 19C를 거쳐 20C에 접어들면서 고객 니즈의 다양화, 상품 정보 원천에 대한 접근성 향상으로 인해 유통업체가 Market에 이슈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고객에게 가장 근접하는 위치를 가졌으며(경영자의 서비스 역할 인식) 마케팅에 필요한 객관적 통계수치(제품별 판매량, 고객구매유형 분석 등)를 지닌 유통업체에 힘이 실리기 시..

    2010/02/22 00:52



어제 밤은 윈도폰 7의 발표로 트위터가 온통 떠들썩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MS가 이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애플과 구글의 판으로 짜여진 차세대 리더 싸움에서 완전히 탈락할 것으로 생각했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상한대로 Zune 을 기초로 한 새판 짜기와 XBox 라이브의 결합이라는 최상의 수를 실제로 생각보다 단기간에 구현해서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성공한 성공적인 발표회였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윈도폰 7 자체에 대한 리뷰는 다른 블로거 분들이 많이 해 주셨고, 앞으로도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저는 약간 쓴소리 관점에서 포지션을 잡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윈도7 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칫솔 님의 리뷰도 괜찮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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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 출시, 그 때까지 시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MWC의 발표에 의하면 윈도폰 7은 올 연말 연휴기간 시즌을 대목으로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소비자들이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더 나아가서는 크롬 운영체제가 장착된 기기들로 옮겨가지 않고 기다려줄까? 입니다.

아마도 올해 여름에는 아이폰 4.0 운영체제와 함께 4G가 선을 보일 가능성이 높고, 안드로이드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개선과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수많은 업체들이 많은 수의 핸드셋을 내놓으면서 대세 장악을 할 것으로 보이는데, 시장 상황이 윈도폰 7을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일단 다른 쪽으로 몰려가는 대세를 막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가 급하게 발표한 것이라는 느낌.  다시 말해 우리에게 연말까지 말미를 준다면 잘해 보겠다는 읍소로 비쳐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일단 시장의 관심을 끌고, 긍정적 평가를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뒤에 언급할 다른 여러 문제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결국 이번 혁신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조력자들의 신뢰가 깨지는 것이 문제다.

어제 MS 직원들과도 일부 트위터로 말씀을 드렸지만, MS의 진정한 위기는 그동안 워낙 윈도 모바일 시리즈가 죽을 쑨 것도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으나 MS를 지원하는 조력자들에게 자신의 목줄기를 죄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이미 우리는 IE 끼워팔기와 액티브X 등을 통해서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되었을 때 MS가 얼마나 위험한 일들을 개발자들과 소비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왔습니다.  이제는 학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형태의 시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생태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조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MS의 운영체제로 작업을 해온 많은 제작사들이 MS에게 지불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시시때대로 들어오는 많은 간섭, 그리고 그들에게 매여서 빼도박도 못하는 난처한 신세를 겪는 것에 대단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윈도폰 7의 경우 개발자들에게 실버라이트 + XNA 를 통한 개발방식을 권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실버라이트가 운영체제 코어에 자리잡으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동안 오피스 2010과 클라우드 서비스를 준비하면서 RIA(Rich Internet Application) 아키텍처의 핵심엔진으로 만들어 온 것을 감안할 때 실버라이트를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표준화된 프로세스와 개방전략을 펼치는 HTML5 식 접근에 비해, 어찌 되었든 다른 플랫폼에서 MS의 실버라이트를 깔고 이에 대한 지배를 받는 구조를 이미 커다란 상처와 경험이 있는 개발자나 제조사들이 받아들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실버라이트가 플래쉬처럼 사실 상의 웹 환경에서의 RIA 표준처럼 많이 쓰여서 레거시를 많이 깔아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보다도 불리한 상황인데 자칫 잘못하면 이번 윈도폰 7의 발표로 실버라이트를 더욱 강력하게 미는 것이 악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반드시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소프트웨어 판매회사, 시대가 바뀌어도 그렇게 할건가?

최근의 웹 2.0 을 중심으로 한 개방전략은 애플의 철학조차 상당부분 흔들어 놓았습니다.  특히 애플의 성공은 수많은 외부 개발자들 및 외부의 조력자들이 애플을 도우면 같이 잘 살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개발에 들어가는 리소스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 않고, 아직도 어느 정도 관리는 하지만 철저히 Outside-In 이 촉진되는 전략을 펼친 것입니다.

안드로이드는 더 합니다.  자유도도 높고, 동시에 이를 따르면 거의 추가적인 부담이 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 나름대로의 특화도 일부 가능합니다.  강력한 제조기반과 특성화 서비스를 추가할 수 있는 제조사라면 자신들만의 특화폰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개발자들은 자바를 이용한 공짜 개발도구로 마음놓고 개발이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부담이 없습니다.

윈도폰 7은 어떨까요?  MS는 전통적으로 아주 비싼 개발도구를 판매합니다.  개발정보 구독도 비쌉니다.  한 마디로 소프트웨어 힘들게 만들었으니 그만큼의 댓가(그 이상일지도 ...)를 지불하라는 행태를 취합니다.  물론 거의 100%를 장악한 PC 시장에서는 이런 접근방법이 먹힐수도 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안하면 돈을 벌지 못하니까요 ...  현재의 휴대폰 시장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시장에서는 MS가 현재 뒤쳐져서 쫓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과감한 비즈니스 모델과 보다 조력자들이 편하게 도와줄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판은 재미있게 되었다.

이러한 가장 기초적인 우려사항들에 대한 해소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의 발표는 UI/UX에 대한 것에 집중되었고, 사업전략과 당근 및 신뢰회복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할 것이라고 하니 좀더 기대를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또한, Zune/XBox 통합 및 PC 기반에서의 탈출이라는 도박적인 시도가 일단은 성공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는 누가 더 조력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의 싸움입니다.  

과거 PC 시대의 영화는 잊으십시오.  이제는 15만개가 넘은 앱들을 가지고 거대한 자산가가 되어버린 애플과 개방성과 수많은 개발자 및 제조사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 그리고 막강한 클라우드 서비스로 무장한 구글이라는 경쟁자들은 이미 많이 앞서가고 있습니다.  도전자라면 도전자의 기백과 혁신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철학이 변하고 있습니다.  투명함과 공유와 협업 중심의 경제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는 일방적인 주도가 아니라 소비자들의 생태계(consumer ecosystem)를 어떻게 구축하고 잘 관리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내부의 자원을 외부로 끌어내서,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내부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사회적 가치를 많이 만들어내는 "Inside-Out" 전략과, 외부에 있는 자원들이 내부의 생태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폭시키도록 도와주는 "Outside-In" 전략을 잘 쓰지 못하는 기업들이 살아남기 힘든 시대입니다.  MS는 과거의 영화와 관련된 기억을 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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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T hiconcep님: [하이컨셉&하이터치]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7 과연 장미빛인가? http://durl.me/bemy

    2010/02/16 10:44
  2. 드디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폰 7 발표 (체험사이트 링크포함)

    Tracked from Blah, blah, blah ~~~ ★  삭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늘 스페인 바르셀로나 MWC 2010에서 윈도우 폰 이벤트를 가졌고, 윈도우 폰 7 시리즈를 발표했다. 윈도우 폰 7 시리즈는 현재 시장에서 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스마트폰 OS를 장착했고, Zune HD의 UI를 채용했으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같이 작동하도록 디자인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디자인 된 칼렌더 기능, 페이스북 같은 소셜 사이트들 내장, Bing 엔진을 통한 로컬 검색 및 디렉션 지원, 오피스 지원 등을 제공한..

    2010/02/16 14:28
  3. MS 제국의 역습, '윈도폰 7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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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인삿말을 끝내고 잠시 무대를 떠나던 스티브 발머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 받은 이는 윈도폰 프로그램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조 벨피오리(Joe Belfiore) 부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40여분 동안 이어진 그의 시연은 이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요. 어제 밤 11시 5분부터 한 시간 넘게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폰 7시리즈(windows phone 7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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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Xbox Live를 모바일로 만나는 '윈도폰7' 어떻게 구현될까?

    Tracked from 김태현의 망상과 공상  삭제

    우리 시간으로 어제 밤 11시에 열린 MWC에서 MS는 윈도폰7(Windows Phone 7)이라는 차세대 스마트폰을 공개하면서 프레젠테이션 중에 거듭 강조한 멘트가 있습니다. Phone is not PC 휴대폰(특히 스마트폰)은 PC가 아니라는 뜻인데요, 아이콘 방식에서 벗어나 모바일 환경에서 사용자 편의를 제공하는 6개의 획기적인 허브 UX를 공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에 반격에 나섰습니다. 실시간으로 라이브를 시청하던 중에 트위터에서 어떤 분은 '..

    2010/02/17 08:58
  5. nalm의 생각

    Tracked from nalm's me2DAY  삭제

    Open Source Open World… 개방에 대해 그리고 Outside-In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인포그래픽

    2010/02/17 11:06
  6. 윈도폰7, MS는 다시 한번 애플을 이길 수 있을까?

    Tracked from 늑돌이네 디지털 동굴 라지온 lazion.com  삭제

    1977년 등장한 애플사의 애플 II 시리즈는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활짝 열었다고 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제품이었다.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내장하고 플로피디스크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8개의 확장 슬롯으로 기능을 추가시킬 수 있었던 획기적인 애플 II 시리즈는 스프레드시트의 효시인 비지캘크(VisiCalc)나 오피스 스윗의 효시인 PFS 시리즈 등의 강력한 소프트웨어 패키지들과 함께 수년간 시장을 선도해갔다. 많은 업체들이 애플 컴퓨터에게 도전했지만 역부..

    2010/02/17 12:00
  7. 윈도폰7에 대한 생각

    Tracked from drzekil의 Talk about Apple  삭제

    설 연휴기간에 MWC에서 윈도폰7이 발표되었다. 이미 많은 기사도 나왔고, 분석도 많이 나온것 같다. 그래도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같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화려한 UI 준HD에서 사용했던 화려한 UI가 윈도폰7에도 사용되었다. 화려함과 참신한 아이디어는 기존의 스마트폰 UI를 완전히 바꿔버릴만큼 새로웠다. 허브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서 꽤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몇가지 걸리는점이 있다. 새로운 UI는 사용자에게 적응을 요구한다...

    2010/02/17 13:33

from Flickr by Ballistik Coffee Boy


방과후 학교와 HP, 그리고 운명적 동지와의 만남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학교공부에 재미를 붙인 스티브 잡스는 6학년 때에는 한 해를 월반을 해서 바로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의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Cup)와 홈스테드 고등학교(Homestead High School)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실리콘 밸리라는 환경은 그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가 10살 때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보게 되는데, 그것은 NASA가 실리콘 밸리에 만들어 놓은 연구센터에 놓였있던 터미널입니다.  터미널은 독자적으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라고 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유선으로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컴퓨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것을 보자 마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는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이니 정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안되나 봅니다.  

어린 학생이지만, 이미 히스키트를 통해 전자부품들과 조립, 그리고 기계들의 동작원리를 깨우친 그는 약간 떨어진 팔로알토에 위치한 HP(휴렛 패커드, Hewlett-Packard)에서 주최하는 방과후 강의에 짬이 나는대로 참여를 합니다.  특히 전자제품 조립에 취미가 많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HP 창업자인 휴렛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수십 분간의 설득을 통해 원하는 부품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위대한 엔지니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k) 입니다.  방과후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어린 학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당시 HP와 같은 벤처회사라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HP에서는 스티브 잡스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 방학인턴을 제의하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방학 때 HP에서 실제로 일을 시작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1950년 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5살이 많습니다.  정말 희대의 독특한 괴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흔히 "워즈(Woz)"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현재도 세계적인 방위산업체로 이름이 높은 록히드 마틴 사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과 희한한 기계들을 만드는 것에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UC 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평생동안 엔지니어로서 기계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휴학을 하고 HP에 취직을 합니다.  HP와 동네에서,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로서 워낙 기계를 좋아하는 독특한 괴짜들이 둘이 만났으니 이들이 금방 친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입니다.  


희대의 장난꾸러기들 교황청을 노리다.

1971년 스티브 워즈니액은 'Blue Box' 라는 장치를 만듭니다.  전화회사 시스템의 특성을 분석한 뒤에, 전화선에 접속해서 돈 한푼 없이 전화를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스티브 워즈니액은 워낙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라 이 장치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장난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고등학생 스티브 잡스는 직감적으로 돈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부품을 $40 달러 정도에 사서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더 만들어 달라고 한 뒤에 이를 스티브 워즈니액이 다니던 UC 버클리 학생들에게 $150 달러에 판매를 합니다.  

특히 판매를 하기 위해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난전화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이 당시의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를 흉내내면서 바티칸 시티에 전화를 해서 교황과 통화를 시도한 사건입니다.  교황이 잠을 자고 있었기에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강심장이었던 워즈니액이었지만 바티칸에서 이를 믿고 교황을 깨우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덜컥나서 먼저 끊었다고 합니다.  


from Flickr by ekai


똑똑한 천재소년과 컴퓨터의 운명적 조우

스티브 잡스에 비해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 한번 본 것은 모조리 외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백과사전이나 성경책 등을 통째로 외우고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11살이 되던 해에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합니다.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학교로 시애틀의 유명한 사립학교인데 동부의 명문대학의 등록금보다도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 학교이고 그만큼 시설도 좋았습니다.  학교의 교육방식도 굉장히 엄격했는데, 이런 환경에 빌 게이츠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항적인 행동이 많아서 결국에는 아동심리치료까지 받게 되는데, 다행히 심리치료사에게 마음의 안정을 얻고 학업에 복귀해서 잘 적응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에게서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고서 엄청난 양의 독서가로 변신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있었다면, 빌 게이츠에게는 심리치료사가 있었습니다.

1968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만남이 있게 됩니다.  레이크사이드 스쿨의 부모회에서 주최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 컴퓨터 단말기를 들여놓게 되는데, GE사의 ASR-33 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가 매우 드물었고, 시애틀에서는 레이크사이드가 최초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는  PC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메인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컴퓨터가 외부에 있고, 이 컴퓨터에 연결이 가능한 터미널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이들 간의 연결은 전화선으로 되어 있었고,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추가로 내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시간 당 40달러나 되는 요금을 감당할 수 있었던 학교의 환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빌 게이츠는 폴 알렌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컴퓨터 단말 앞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됩니다.  컴퓨터 단말기 앞에서 선생님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닦게 된 그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과도한 컴퓨터 사용량으로 인해 초기에 확보한 예산이 단 몇 주만에 동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학교에서의 컴퓨터 사용이 금지되었는데, 이미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된 이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실력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A young Bill Gates and Paul Allen by SplaTT.
from Flickr by SplaTT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모아서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들은 메인프레임 컴퓨터 임대와 판매를 하는 인근 회사에 찾아가서 프로그래밍과 프로그램에서 버그를 찾는 일을 하는 대신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야간에 쓸 수 있는 허락을 얻어내어 컴퓨터를 마음대로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사도 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폴 알렌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시애틀의 명문대학인 워싱턴 주립대학교(UW,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워낙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비록 고등학생들이지만 일거리를 주는 곳들이 생겨납니다.  특히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를 통해 만든 급여관리 프로그램의 경우 빌 게이츠가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서 3개월간의 작업을 통해 1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에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정식으로 창업을 합니다.  이 때에는 아버지가 직접 도와주게 되는데, 회사의 이름은 "TRAF-O-DATA" 입니다.  외부에서 용역을 받은 일로도 돈을 벌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관리 프로그램의 제작을 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을 한 빌 게이츠는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으로 둘러싸여 지내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감합니다.


(후속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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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동거 중인 대학원생 부모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온 가난한 대학원생들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었던 이 젊은이들은 아이가 태어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입양기관에 아이를 넘깁니다.  아이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터전을 둔 한 기계공 부부에게 입양이 되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 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가족은 그가 5살 때 마운틴 뷰(Mountain View, 오늘날 구글 등의 본사가 위치한 실리콘 밸리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애플이 탄생하게 됩니다.


과수원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도시가 되는 환경속에 자라다.

캘리포니아의 북부 샌프란시스코만의 남부에 위치한 실리콘 밸리는 스탠포드 대학을 중심으로 주변의 라디오와 TV, 그리고 군에 납품을 하던 여러 전자부품 회사들을 중심으로 초창기 성장을 하였습니다.  1940~50년대 스탠포드 대학의 공대 학장이었던 프레데릭 터만(Frederick Terman)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창업을 장려하는데, 이런 정책 속에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가 HP(Hewlett-Packard) 입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반도체와 전기/전자 관련한 하이테크 회사들이 나타나면서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대표하는 기술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벨 연구소를 1953년에 떠난 쇼클리(Shockley)가 1956년 창업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통해 당시 트랜지스터를 게르마늄보다 실리콘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는 확신 속에 여러 연구를 진행하였으나 자신의 회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이 회사의 엔지니어 8명이 창업한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 그리고 그 중에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창업한 인텔로 뿌리가 이어지면서 실리콘 밸리의 신화가 가속화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학창시절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였다고 한다.  학교도 다니기 싫어해서 결석을 많이 하였는데,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  그것은 히스키트(Heathkit)라는 아마추어용 전자공학 키트였습니다.  그의 양아버지도 기계공학을 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5~6세 일때 이미 그에게 작은 워크벤치와 도구들을 주면서 언제라도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여기에 HP에 다니던 동네 아저씨가 건네 준 히스키트와 마이크, 스피커와 같은 다양한 재미있는 기계들에 대한 설명과 경험은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를 만들게 한 열정과 자신감을 선사하게 된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의 DNA를 이끌고 있는 멋지고 창의적인 하드웨어에 대한 열정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동갑나기 라이벌

스티브 잡스와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빌 게이츠는 1955년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유력한 은행들의 이사진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네셔널뱅크(national bank)의 총재였으니, 태어날 때부터 빌 게이츠는 법과 경제라는 현재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에 대해 익숙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다소 평범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 밸리 한 가운데에서 자라면서 신기한 물건들과 기계들을 접하면서 자랐는데에 비해, 빌 게이츠는 13살이 되어 레이크사이드 스쿨(중/고등학교 통합 사립학교)에 들어가서 컴퓨터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면서 세상을 바꾸게 되는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컴퓨터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소프트웨어와 관련된 것이었고,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DNA가 되었습니다.

(후속편으로 이어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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