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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Marissa Mayer from Flickr by mikeabundo


IT 삼국지, 오늘은 구글 초창기 인재들이 몰려들던 시기를 배경으로 구글의 오늘날을 이끌어 낸 사람들을 몇 명과 초기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금발의 컴퓨터 우등생, 그리고 구글을 사랑한 무료봉사 학생

1999년초 팔로알토 근처로 구글이 이사를 한 이후, 탁구대와 마사지, 그리고 다양한 간식과 음료수들로 가득한 구글의 사무실에 금발의 미녀가 한명 찾아옵니다.  바로 현재 구글의 검색과 UX 부분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마리사 마이어(Marissa Mayer) 입니다.  그녀는 당시 스탠포드의 컴퓨터과학과 석사 졸업반으로 구글의 엄격한 인터뷰를 통과하고 초기 구글의 20명의 직원들 중에서 첫번째 여성이 됩니다.  

마리사 마이어는 뛰어난 컴퓨터 과학자이자, 동시에 여성 특유의 꼼꼼함과 철저한 관리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구글의 가장 중요한 검색과 관련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미모로 구글의 창업자 중의 한 명인 래리 페이지와 사랑에 빠져서 3년 정도 공개적으로 데이트도 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헤어져서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구글 내에서 가장 인정받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며, 특히 2명의 창업자와 CEO 인 에릭 슈미츠를 제외하면 구글 내에서 가장 주요 언론매체에 많이 노출되고, 커버 스토리에도 오르는 등 스타성까지 갖춘 인물입니다.

엔지니어들은 차고 넘쳤지만, 기술위주의 문화를 가진 구글이라는 회사에게 있어 경영부분은 정말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초기 엔젤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 가끔씩 챙겨주기는 했지만, 두 명의 창업자들은 사업계획서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경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때, 스탠포드 대학에서 생물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살라르 카만가르(Salar Kamangar)가 무료로 구글에 봉사하겠다며 찾아옵니다.  람 슈리람은 카만가르에게 사업계획 초안을 만들도록 지도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다른 회사들과 구글의 검색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멋지게 정리를 해내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구글의 정식직원이 됩니다.  살라르 카만가르는 현재도 구글에서 제품관리(Product Management)의 부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경험있는 영업 부사장의 영입, 넷스케이프와의 협력

비록 살라르 카만가르가 사업계획은 작성했지만, 그도 역시나 학생이었고, 구글이라는 회사의 직원들은 너무나 어린 풋내기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람 슈리람은 구글에 경험이 있는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영업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1998년 말 넷스케이프가 AOL에 매각되면서 넷스케이프에 있던 유능한 인재들 중에서 회사를 옮기려고 생각하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Omid Kordestani)가 람 슈리람의 레이다에 걸립니다.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넷스케이프의 사업개발 담당 부사장을 지냈고, 인터넷 사업의 영업에도 경험이 많았기에 구글의 영업담당 부사장으로서 적임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람 슈리람은 그를 두 명의 창업자에게 소개하지만 구글의 엔지니어를 우대하고, 경영자들을 우습게 보던 당시의 구글의 문화에서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면접을 치르면서 정말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5시간이 넘는 면접을 통해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2주가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에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구글의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무렵 구글에서 연락이 옵니다.  거기에 회사의 스톡옵션도 2%나 받으면서, 이후까지를 모두 감안하더라도 2명의 창업자와 CEO가 되는 에릭 슈미트를 제외하면 구글 전직원 중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가지게 되면서 구글의 IPO와 함께 억만장자 대열에 오릅니다.  그의 합류와 함께 구글의 형편없던 사업계획서는 제대로된 형태를 갖추게 되며, 이후 검색광고의 수익모델화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광고주들을 유치하는 활약을 하면서 구글의 기술을 실제 수익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는, 현재 구글 창업자들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아직도 구글의 경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1999년 6월,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투자유치 소식과 함께, 구글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계약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어렵게 영입한 넷스케이프 출신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가 당시 최고의 웹 브라우저의 하나였던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의 기본 검색엔진으로 구글이 탑재될 수 있도록 AOL과 계약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구글은 하루 3백만 건이 넘는 검색 건수를 기록하며,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요리사 경진대회를 통한 전속 요리사의 채용

자금도 넉넉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채용하다보니 더 이상 팔로알토의 사무실은 비좁아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미래를 감안하여 팔로알토를 떠나 마운틴 뷰(Mountain View)의 대로변에 있는 큰 건물을 하나 임대합니다.  문제는 번화가인 팔로알토의 사무실과는 달리, 마운틴 뷰의 새로운 캠퍼스에는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직원들이 차를 타고 식사를 하러 나가거나, 피자 등을 배달시켜 먹는 부실한 식사환경 이었습니다.

이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회사 내에 요리를 할 수 있는 전속 요리사를 두고, 직원들에게 최상의 요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곧바로 요리사 오디션 주간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입사를 희망하는 요리사들을 불러서 매일 몇 명의 요리사들이 자신들이 준비한 요리들로 직원들의 평가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전속 요리사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구글의 1호 요리사는 바로 찰리 에이어스(Charlie Ayers) 입니다.  구글에 입사하기 이전 힐튼 호텔에서 요리를 배우고, 요리를 전공으로 대학을 다닌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던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주방장이기도 하였던 그는, 구글의 매력에 빠져 어찌보면 모험일수도 있는 도전에 나서서 결국 커다란 성공을 이룹니다.  2006년 구글을 떠나기까지, 찰리 에이어스는 5명의 주방장과 150명의 요리사들을 지휘하는데, 구글 캠퍼스에 산재한 10개의 카페에서 매일 4,000 식이 넘는 음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독립하여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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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도 구글의 초기 창업시절 이야기 입니다.


놀이터형 회사의 탄생

초기 구글이라는 회사와 두 명의 창업자의 비전을 믿고 선뜻 투자를 했던 초기 투자자 네 명에게 받은 100만 달러와 일부 소액 투자자 등에게서 조달한 돈이 있었지만 구글이라는 회사는 수익이 거의 없었습니다.  최초의 수익은 당시 공짜 오픈소스 운영체제로 유명했던 리눅스(Linux)를 배포하는 레드햇(RedHat)이라는 회사에게 검색결과를 제공하기로 계약하고 한달에 2천 달러를 받기로 한 것과 일부 사이트에 구글 검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매우 적은 사용료를 받은 것이 전부 였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확장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였고, 매일 검색 수는 수만 건에 달하면서 네트워크 트래픽과 서버비용이 모두 크게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구글의 장점이었던 빠른 검색역시 트래픽과 정보량의 증가로 인해 3~4초씩 걸리는 등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과 투자가 필요했는데, 차고는 비좁아서 더 이상 이들이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1999년 구글은 차고에서 나와서 팔로알토(Palo Alto) 도심에 있는 2층 건물로 옮겨서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누구나 새벽까지 먹을 수 있는 각종 간식과 회의실에서 마사지 서비스를 하고, 회의탁자를 겸해서 녹색 탁구대를 구매하는 등 회사를 거의 놀이터화하기 시작하였고, 직원들이 먹고, 놀고, 마시면서 일을 하는 현재의 구글의 원시적인 캠퍼스 형태가 탄생합니다.


미국의 벤처캐피탈, 구글의 진가를 알아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구글이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는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고, 인터넷은 너무 빨리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의 수혈이 필요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총대를 맨 것은 초기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었습니다.   슈리람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이자 IT 삼국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양대산맥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연결합니다.  

KPCB 는 인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컴팩, 넷스케이프, 아마존 등에 투자를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시스코, EA, 오라클, 야후, 그리고 애플에 투자한 회사입니다.  두 회사모두 투자자금을 모을 때부터 아주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면 돈을 낼 기회조차 주지않을 정도로 커다란 명성을 가진 곳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회사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습니다.  KPCB는 건물도 화려하고, 급진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준다면, 세콰이어 캐피탈은 오래된 빌딩에서 매우 보수적인  올드보이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인지, KPCB는 미래가치를 높이보는 편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향후 높은 가치를 돌려줄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보다 현실적이고 사업내용이나 계획, 그리고 경영자 등을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합니다.

구글의 상대를 맡은 사람은 KPCB의 존 도어(John Doerr)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 였습니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등의 투자를 결정하면서 업계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고, 마이클 모리츠는 옥스포드 출신으로 <타임>지의 기자 출신입니다. 마이클 모리츠의 경우 애플의 취재를 담당했다가 스티브 잡스의 독선적인 스타일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스티브 잡스가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랬던 그가 애플의 가장 중요한 투자자인 세콰이어 캐피탈의 파트너로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마이클 모리츠는 야후와 페이팔(PayPal)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구글의 두 창업자와의 미팅을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그들의 비전에 홀딱 반하게 되고,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은 서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투자만 받으라고 구글의 두 창업자들을 설득하지만, 이들은 둘 모두에게 받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런데, 구글의 현재 평가액을 $1억 달러로 두 벤처캐피탈이 공히 매긴 것이 돌파구를 찾아줍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3의 벤처캐피탈이 $1.5억 달러로 평가를 해준다면서, 둘 다 투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세르게이 브린의 으름짱이 먹혀들면서 양쪽이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투자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99년 6월 7일, 실리콘밸리의 양대 벤처캐피탈이 구글이라는 신생회사에게 각각 $1250만 달러 씩 $25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지분을 25% 확보했다는 뉴스가 결국 세상에 나오면서, 공동 기자회견도 하는 등 한 순간에 스타 벤처기업으로서의 길을 구글이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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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직원 #1, 크래이그 실버스타인 (Craig Silverstein)


IT 삼국지, 지난 포스팅에 이어 오늘도 구글의 창업과 관련한 이야기 입니다.  


구글의 첫번째 직원, 크래이그 실버스타인

1998년 앤디 벡톨샤임에게 즉석에서 받은 10만달러 수표로 창업에 나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세르게이의 친구이자 인텔의 엔지니어로 일하던 수전 워지츠키가 집주인의 한 명으로 있었던 집의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번째 직원을 뽑았는데, 그가 바로 현재 구글의 기술이사(Director of Technology)를 맡고 있는 크래이그 실버스타인(Craig Silverstein) 입니다.

실버스타인은 10만 달러라는 적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구글이라는 회사에게 최저 수준의 연봉만을 받겠다고 받아들이는 대신, 주식을 요구해서 받았습니다.  그의 이런 선택은 이후 그에게 많은 부를 가져왔지만, 구글이라는 회사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밤낮, 주말을 가리지 않고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일을 하였고, 집으로 가야되는 날에는 실버스타인이 가지고 있었던 오래된 포르쉐를 타고 퇴근하였다고 합니다.  실버스타인의 포르쉐는 소리도 굉장히 컸지만, 바로 움직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아서 차를 두명의 창업자가 뒤에서 밀고 도로까지 나와야 움직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이 때 3명이 처음 운영하던 시기의 추억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글의 진가를 알아본 현명한 초기 투자자들

그렇지만 10만 달러라는 돈은 사실 이들이 사업을 전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얼마 지나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는 또다른 투자자가 필요하였습니다.  

이 때 도움을 얻은 것은 역시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인 제프리 울만의 소개로 만난 엔젤투자자 람 슈리람(Ram Shriram) 입니다.  그는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구글의 두 창업자를 만나 검색엔진을 시험해 보고난 뒤에 자신이 당시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인 야후, 인포시크, 익사이트 등에 매각을 해보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회사를 사지 않을 것이라고 두 명의 창업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람 슈리람에게 한 번 시도를 해보라고 맡기고 몇 개월을 기다립니다.

람 슈리람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인터넷 기업인 야후의 제리 양과 데이빗 파일로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이들은 구글의 검색엔진의 성능에 탄복을 하였지만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검색엔진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검색결과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검색엔진을 채용할 경우 야후 사이트에서 너무 빨리 벗어날 수 있어서 되려 좋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여러 페이지를 보면서 사이트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야 페이지 뷰가 올라가게 되고, 이렇게 올라간 페이지 뷰가 사이트에 달린 광고단가를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후의 두 창업자의 반응을 듣고서 람 슈리람은 되려 구글이라는 회사가 진정한 투자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미팅에서 돌아온 슈리람은 구글의 회사설립 작업에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직접 25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면서 앤디 벡톨샤임에 이은 두번째 투자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수익모델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혁신의 시기에 자기잠식을 하지 못하는 기업의 미래가 없는 것은 야후가 너무나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세번째 투자자는 앤디 벡톨샤임을 두 창업자에게 소개한 데이비드 체리턴 교수입니다.  

네번째 투자자는 바로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 입니다.  람 슈리람과 아마존의 일로 잘 알고 지내던 제프 베조스는 구글의 두 창업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바로 소개를 해 달라고 해서 만난 뒤에 즉시 수표에 서명을 하고 구글의 투자자가 됩니다.  제프 베조스에 따르면 구글의 두 창업자들의 고객에 초점을 둔 비전에 반했고, 이들의 비전을 믿고 주저없이 투자를 합니다.  제프 베조스에게도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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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from kasun04.wordpress.com


IT 삼국지, 오늘은 드디어 두 명의 천재가 만나는 이야기 입니다.  


두 천재의 조우

매릴랜드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수학을 전공하며 수석으로 졸업을 한 세르게이 브린은 1993년 미국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과학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습니다.  활달한 성격과 천재적인 두뇌로 많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리더로 자리잡고 있었던 세르게이 브린에게 1995년 미시건 대학의 또 다른 천재가 스탠포드 대학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레리 페이지 입니다.  나이는 동갑나기이지만, 대학원에서는 세르게이 브린이 선배인 셈입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래리 페이지를 만나고는 정말 마음에 들지않는 라이벌이 나타났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서 리딩을 하는 외향적인 세르게이 브린에 비해, 래리 페이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매우 치열하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런 래리 페이지에게 세르게이 브린은 다른 친구들이나 선후배와는 다른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전공과목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철학과 문화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지식에 대한 토론을 날을 지새기 일쑤 였습니다.  둘이서 격론을 시작하면, 주위의 동료들은 이들을 피해다닐 정도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었고, 이런 토론과 다툼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은 어느 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혼의 동반자(soul-mate)로 느껴질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의 프로젝트에 세르게이 브린이 생명을 불어넣다.

많은 대학원들과 마찬가지로 스탠포드 대학에도 조를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웹 사이트를 서버에 긁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인터넷의 크기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년이 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르게이 브린은 영화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것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좋은 논문은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이라는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을 웹 페이지의 랭킹을 매기는 데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특정 사이트가 다른 사이트로 연결되는 백링크(BackLinks)를 조사하여, 각각의 웹 페이지가 얼마나 많은 사이트에 링크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이것을 기본으로 랭킹을 매기자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프로젝트를 웹 사이트의 링크를 역으로 추적한다는 의미의 백럽(BackRub)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세르게이 브린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래리 페이지가 구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세르게이 브린이 도움을 주면서 프로젝트에 조금씩 관여를 하다가, 어느 덧 둘이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기본적으로 전세계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웹 페이지들을 찾아내서 이를 끌고 들어오는 소프트웨어 로봇(크롤러, crawler 라고 합니다)과 이를 관리하는 서버는 시간이 지나면서 인터넷의 크기가 광범위해지자,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시스템과 네트워크 자원을 엄청나게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테리 위노그래드 교수와 라지브 모트와니 교수 등의 지원으로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1996년부터 스탠포드 대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제공된 이들의 검색 서비스는 학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원의 학생으로서 많은 비용을 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효율적인 분산처리를 위해 CPU와 메인보드 등을 구해서 간단히 인터넷 서버를 구축하고, 운영체제도 무료인 리눅스를 선택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선택하였는데 어찌보면 이런 환경이 오늘날의 구글 데이터 센터를 있게 만든 기술력 축적을 유도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넉넉하고 값비싼 서버와 소프트웨어를 마음껏 사용해서 서비스를 구축했더라면 현재의 구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글 초창기 서버, 학교에서 남는 CPU와 보드를 주워다가 케이스는 레고로 조립했다 


구글의 탄생, 전세계를 담아라 ...

초창기 백럽(BackRub) 검색엔진 기술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알고리즘이었기에 페이지랭크(PageRank)로 명명된 이 알고리즘은 이들이 논문을 내기로 합의한 1998년 1월 이전까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BackRub 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이용하기로 결심하는데, 동료 중의 하나가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구골(GooGol) 이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데이터 검색을 한다는 이미지를 주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아쉽게도 도메인이 선점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신 이용한 도메인이 구글(Google)입니다.  구골보다 발음하기도 쉽고, 창조적인 느낌도 나는 이름이었기에 모두들 구글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였고, 서비스는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도메인을 이용하여, http://google.stanford.edu 에 접속하도록 하였는데, 하루 접속횟수가 1만 건을 넘어가면서 학교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학교 네트워크 전체를 마비시키는 일까지 발생하자, 더 이상 학교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이 검색 서비스를 외부에 팔아넘기기로 합의하고 원매자를 찾아 나섭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100만 달러 정도면 구글 서비스를 팔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검색엔진 부분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졌던 알타비스타(altavista)와 야후도 접촉했지만, 이들이 개발한 서비스를 인수하려는 기업은 없었습니다.  그 밖에도 검색에 관심을 가질만한 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접촉했으나 번번히 거절의 쓴 맛을 보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도교수인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들이 만든 서비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데이비드 체리턴은 이들의 창업을 도와주기로 하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눈에 가치를 알아본 엔젤 투자자와의 만남

데이비드 체리턴이 소개한 사람 중에서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은 한 눈에 이들의 서비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직 설립도 되지 않은 회사인 구글에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 줍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는 자신감을 불러넣어 주었고, 자신에게도 엄청난 부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벡톨샤임은 지난 IT 삼국지에서 소개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창업한 인물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고, 구글에 투자할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직관은 검색이란 서비스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처했던 야후나 알타비스타의 전문가들이나 경영진들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세상을 바꿀 힘을 그는 느꼈던 것입니다.

앤디의 10만 달러 수표를 받아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스탠포드 대학교 인근의 한 차고를 사무실로 빌려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이렇게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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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GUI 운영체제를 구현한 Xerox Star Workstation from Wikipedia.org


오늘은 GUI 를 둘러싼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제록스의 치열한 법정다툼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비록 마이크로소프트가 MS-DOS 로 IBM-PC 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었지만, 경쟁관계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애플은 매킨토시라는 하드웨어를 생산하면서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무기로 데스크탑 출판 시장을 장악하고 그래픽 소프트웨어들을 무기로 확실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MS-DOS 기반의 비즈니스 솔루션 위주로 사업을 풀어간 IBM-PC 호환기종과는 상당히 다른 시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를 고소하다.

그렇지만, 한눈에 GUI가 세상을 바꿀 것을 직감한 빌 게이츠는 애플에게 GUI 의 일부분을 라이센스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였고, 애플은 이를 허용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MS-DOS 기반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1.0 을 제작해서 출시하는데, 이 때만 하더라도 매킨토시의 GUI와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었으며, 버그도 많고 느렸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윈도 2.0 에서는 윈도우가 중첩이 될 수 있는 것을 포함하여 매킨토시 GUI와 유사한 다른 부분들을 포함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애당초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합의한 수준의 라이센스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지적재산권 침해로 고소를 하게 됩니다.

애플이 고소를 한 내용은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룩엔팰(look and feel)"을 윈도우가 그대로 복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윈도우의 모양이나 나타나는 패턴, 사라지는 패턴, 중첩되는 형태와 타이틀 바 등, GUI 의 요소기술 189가지를 애플이 열거하였습니다.  


제록스, 애플을 고소하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심리를 거쳐 189개의 요소 중에서 179개의 요소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1.0 을 제작할 당시 애플과 합의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나머지 10개는 지적재산권의 보호범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고소가 진행되는 와중에, 세계 최초로 GUI 를 개발했던 제록스(Xerox)는 애플을 상대로 지적재산권 침해소송을 냅니다.  이미 이 시리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애플이 매킨토시와 리사에 적용된 GUI 운영체제를 개발하게 된 것은 제록스 파크(Xerox PARC) 연구소를 들렀다가, 이들이 개발하고 있던 GUI를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제록스는 애플에 현물투자를 하고 애플의 주식을 일부 받은 기념으로 매킨토시 디자인 팀을 초청했던 것인데, 이것이 매킨토시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고, 매킨토시는 윈도우의 탄생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록스의 소송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지 3년이 넘어서 제기를 하였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맙니다.


전체적인 느낌 vs. 세부요소

이 소송은 그 이면에 있는 세 회사들 사이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판례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애플은 전체적인 "룩앤필(Look and Feel)"에 대한 침해를 인정받고 싶어하였고, 이를 그대로 베낀다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법원에서는 전체적인 느낌을 지적재산권 침해의 대상으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대신 구체적인 아이템들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예를 들어 윈도 모양, 아이콘 이미지나 각각의 메뉴들, 그리고 객체들을 열고 닫는 방식과 같이 세부적인 요소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각각은 대부분 애플이 자신들의 원천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고, 애플이 주장하는 많은 구성요소를 하나로 합친 "전체적인 느낌"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92년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이후 5년 뒤인 1997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GUI 문제와 함께 애플의 퀵타임(QuickTime) 기술에 대한 지적재산권 침해문제를 포괄하여 합의를 통한 분쟁해결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에는 이미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95를 통해 애플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상태로 커진 뒤였고,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피스를 더 이상 애플을 위해 개발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애플을 압박하였기에 당시의 애플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합의를 하게 됩니다.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를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대신 자사의 디폴트 브라우저로 채택하기로 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에게 마이크로소프프 오피스 제품군을 계속 개발해서 최소 향후 5년간 공급하며, 애플의 주식을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사들이게 되면서 동시에 상당수 특허 크로스-라이센싱을 하는데 합의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후에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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