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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는 2005년 5월 21일, 건축가 정기용씨를 초청하여 ‘건축과 보살핌’이라는 주제로 우리들병원 직원교육을 개최하였던 특강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건축가 정기용씨는 순천기적의 도서관, 무주군청 등을 건축하고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하였으며, 한국종합예술학교 건축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신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이고,  ㈜열음사의 사옥이자 학전소극장이 있는 예술적인 건물인 동숭동 무애빌딩도 건축하였습니다.

강의의 내용이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과 용산참사를 보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보살핌의 리더쉽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지요?  더불어 건축에 있어서도 때려 부쉬고 새로 갈아엎는 것만이 능사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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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건축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린시절 살던 기억 속의 집,
둘째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
셋째는 머리 속에 꿈꾸는 집입니다.

집은 특별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살기 위해서 짓는 것입니다.
즉 건축은 삶을 조직하는 것이지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란 삶을 조직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놓은 형태 속에서 자신의 삶을 조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조직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보살핌'입니다.  의사는 사람을 보살피는 직업이고, 건축가는 삶을 보살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두 직업은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가치가 우선시 되어야 ...

우리나라는 60여년 동안 나와 내 가족 등 개인을 위해 달려왔고 빠른 성공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입니다. 우리들, 즉 더불어 사는 모든 세상을 위해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를 접고 남을 배려하는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길을 처음 만들 때, 보통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하여 길을 만듭니다.  증조 할아버지 시대에 길이 만들어졌다면, 증조할아버지가 그 길에 서서 바라보던 경치를 할아버지가 똑같이 볼 것이고, 할아버지가 바라보던 경치를 또한 아버지가 보고, 그 아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길을 만들었으나, 길은 또 한편으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마치 '그림일기'와 같다고 사회학자들은 말합니다. 

건축은 집을 짓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서해안 갯벌에는 작은 게들이 살고 있습니다.  밀물 때가 되면 게들이 지은 집이 모두 물에 쓸려 망가지고 썰물 때는 게들이 다시 자신들의 망가진 집을 수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을 짓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수억 년간 게들이 갯벌에 집을 지었지만 갯벌은 갯벌 자체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집을 짓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고전건축

우리의 전통건축물들을 살펴보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된 사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동하회마을 병산서원에 있는 ‘만대루’입니다.

한국 전통건축을 이해하려면 안에서 무엇이 보이는 지를 곰곰이 살펴봐야 합니다. ‘만대루’는 바깥의 자연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건축물과 하나가 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대루에 앉으면 산이 일어나고, 우리가 일어서면 산이 앉습니다.  이처럼 고전건축은 산, 나무, 이웃집, 앞채, 옆방 등 관계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집이 일체가 되도록 건축하기 위해 무한한 고민을 하였음을 ‘만대루’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즉 자연환경, 건축물, 그리고 사람이 일체가 되어 안목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리학은 하늘, 땅, 인간이 합일되는 이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학자들은 땅도 함부로 파지않고, 길도 함부로 내지 않았습니다.  경주 양동마을에 위치한, 회재 이언적의 집인 '향단'은 삐뚤어진 땅을 반듯하게 깎아낸 후 건축된 것이 아니라 원래 땅의 형태에 맞춰 지어져 있습니다.  양동마을에 있는 ‘무첨당’, '관가정' 등 다른 건물들에서도 하늘, 땅, 인간이 하나가 된 건축의 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목조건축은 못을 쓰지 않고 맞물려 짜맞춤 되는 방식으로 건축이 이뤄집니다.  지붕이 주춧돌에 의해 바쳐지듯, 자연스럽게 재료들이 결속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듯 튼튼하게 건축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며 결속되어야 튼튼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경사진 땅의 형태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 집을 짓듯, 자연을 보살피고 양보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밖에, 강원도 봉정사의 극락전도 지형을 점진적으로 극복하여 건축된 사례이며, 창덕궁의 테라스도 경사진 지형 위에 퇴물림 기법을 이용해 주춧돌이 조금씩 차이를 두고 뒤로 가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사를 활용한 건축물의 결정판은 불국사 기단입니다.  불규칙한 자연석들이 전체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돌 형상에 맞춰 나무 밑동구리를 깎아 '그랭이질'을 해서 서로 맞춘 것에 주목할 만합니다.

즉,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은 보살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외형보다는 보살핌을 위한 컨텐츠가 중요

경상도 봉화 닭실마을의 ‘청암정’은 이 세상 만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배려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소쇄원에서도, 대동여지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은 땅을 형상이 아닌 흐름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땅을 전체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자연을 무시하고 으스대는 건축이 아니라, 자연을 보살피는 건축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한국의 현대 건축은 파괴의 길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등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버젓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청약하기 위해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아파트가 당첨되면 풍요를 느낍니다.  머물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이사 다니기 위해 사는 삶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서울이 부산 같고, 부산이 전주 같고, 전주가 대구 같을 정도로, 어느덧 모든 도시의 정체성은 소멸되어버렸습니다.
 
즉 우리가 아무데도 아닌 곳에서 살고 있는 꼴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콘텐츠는 무시한 채, 외형만을 중요시하는 트랜드가 최근 우리나라의 문화현상이었다면, 이제는 남을 보살피는 방향으로 바뀌어 나가야 합니다.  전차가 다니던 그 옛날의 종로의 모습은, 이제는 낯선 광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제, 도시는 즐거워져야 합니다.  현대건축은 보살핌이 되야 합니다.

중국의 전통가옥 중에 '토루'라는 공동주택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집이고 아파트고 한 마을입니다.  흙을 쌓아 집을 지었으며, 하늘, 우주, 마당을 공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보살핌의 궁극적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즉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보살핌을 건축한 사례


건축가 정기용이 건축한 무주군청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차가 주인이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반지하 주차장을 만들어 지상에서 차를 없애고 그 곳에 마당을 만들었으며, 건물 1층에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군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군청은 군민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무주공설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볕을 가려줄 그늘이 없어 사람이 찾아오지 않던 곳에 등나무 이백사십 그루를 심고, 정기용은 등나무가 타고 올라올 수 있는 기둥과 지붕을 건축했습니다.  즉 무주군수는 군민을, 건축가는 등나무를 보살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건축의 형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의 건축 사례를 참고로 도서관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10년간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해온 맹렬 아주머니와 논의해 도서관의 콘텐츠를 구성했습니다.  이것도 보살핌의 건축입니다. 도서관이 선입견에서 타파해 색다른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책과 어린아이가 만나는 4개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으며, 잠재우는 방, 미로, 강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나무가 도서관을 에워싸고 있는 것도 보살핌의 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기용이 건축한 흙집은 콘크리트와 흙을 혼합해 건축한 것입니다.  콘크리트는 최소량만 사용했고 대부분 흙을 사용해 자연친화적으로 건축하였습니다.  빛이 집안으로 들어오되, 필요한 부분만 창을 내어 바깥과 관계를 맺습니다.



의료 역시 보살핌이 가장 중요한 가치

지금 서울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는 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움의 핵심은 우리를 위해 어디를 비우느냐에 있습니다.  전통건축 중 가장 위대한 것을 '마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워진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보살핌의 최고 미덕이 바로 비우는 데 있습니다.  남을 위해 비우고 서브(serve)하면 채워질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밑동까지 내어주는 한 그루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살핌의 미덕을 최고로 여기고 환자를 대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 세대에 남겨줄 가장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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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3년이 넘은 강의내용을 이렇게 특별한 허락도 받지 않고 게재를 해서 정기용 선생님께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마도 글의 내용이나 의도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공유를 하는 기쁨에 대해 선생님께서도 기꺼이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강의내용은 우리들 웹진을 통해서도 발간된 바 있습니다. 

우리들 웹진으로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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